Search Results

'2009/05'에 해당하는 글들

  1. 2009/05/31  걷는 데이트
  2. 2009/05/30  감당할 수 없는 사실
  3. 2009/05/26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2)
  4. 2009/05/23  한국콘텐츠학회 2009 춘계종합학술대회 (2)
  5. 2009/05/18  강보라의 프랙탈 (3)
  6. 2009/05/17  서울재즈페스티벌 2009 (3)
  7. 2009/05/15  여자라서 고민돼요 (2)
  8. 2009/05/05  과학보다 예술!

걷는 데이트

사용자 삽입 이미지

느리게 걷기라는 이름의 까페에 가면 이상하게도 전혀 걸을 분위기가 안 나지만, 뭐 몇몇 그런 곳을 제외하면 서울에서도 걷기 좋은 곳이 꽤 많다. 일산과 분당과 같이 계획형 위성도시에까지 이른다면 그 수는 훨씬 많아질 것이다. 아무튼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 동갑내기 친구가 산의 색이 각기 다른 게 눈에 들어오더라고 말했던 것처럼 자연의 변화와 자연의 본성에 눈뜨게 되는 것 같다.

독일에 있을 때 가장 좋았던 것이 푸른 녹음을 도심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뮌헨에서는 영국식 정원이 드넓은 규모를 자랑했고, 베를린에서는 공중에서 보면 물과 숲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명성처럼, 크고 작은 공원들이 즐비했다. 파리에서도 런던에서도 공통적으로 목도했던 산책문화. 그리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일상의 대화들, 자연에의 감동들. 한국에 돌아온 후로도 한참이나 그리워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던 것이 몇 년 새, 한국 특히 서울 내에서도 걷기에 즐거운 코스들이 늘어나면서 타향에서 찾곤 했던 여유를 새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가족과 친구와 연인과 함께 걷고, 또 걷는 그 맞잡은 손들을 보며, 굳이 멀리서 놀거리를 찾지 않아도 됨을 깨닫는다. 흙의 소리와 나무의 색, 사람냄새가 한 데 엉켜 그야말로 낭만적인 장면이 곳곳에서 연출되니 말이다. 한 때 뚜벅이라는 표현이 놀림거리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자처해서 뚜벅이가 되고프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영원히 걷고 싶다. (서울 도심 산책 코스 추천)

2009/05/31 22:15 2009/05/31 22:15

감당할 수 없는 사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간에게는 믿고 싶어하는 것을 보는 심리가 다분히 존재한다. 하나의 현안에 대해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할 때, ‘기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은 자연히 파생된다. 그리고 그 이후의 문제들로 논쟁은 또 다른 논쟁을 낳는다.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탈현대. 이를 단지 복합적 과도기라고 봐야 할까. 그렇기에 우리는 늘 진실이란 허수를 쫓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희생자와 순간의 영웅. 이 둘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테다. 하나의 진실은 다른 하나의 진실을 거짓으로 만들 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고자 하는) 절대적 답을 찾는 게 그렇게도 중요한 가. 과연 무엇을 위한 진실 찾기인가. 진실을 감당할 수 있기는 한 건가. 그 순간이 도래하면, 어떻게 할 것 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도망갈 것인가? 온갖 물음들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마더>는 그렇게 내게 모성애와는 관계없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2009/05/30 23:45 2009/05/30 23:45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자신이 가깝게 알고 있다는 이와 순간 연락이 끊어진 적이 있는가. ()의 주소, 이메일, 핸드폰 번호,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장소 등등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갑자기 연락이 닿지 않아 전전긍긍하는가. 행방의 여부는 둘째치고, ()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지는 않는가. 오해와 착각은 (적어도 지구라는 행성 내에서는) 고도의 지능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인간 고유의 산물임에는 틀림없다. 동시에 이는 인간의 이성이 비단 발전적인 방향으로만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은 내가 보고 있는 것 이외에는 못 본다라는 뜻이 된다. 같은 논리로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외에는 알지 못한다는 게 된다. 결국 본다에서 파생된 착각과 안다에서 파생된 오해가 빚는 파급효과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우리는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위의 에피소드는 이와 같은 인지와 이해의 양면성(또는 그 허수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그러니 결론은 인간이여, 오만해 지지 말라”! 실제 당신은 그 무엇도,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을 지도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는 한 가족의 파멸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파멸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들(어머니의 죽음이나 아들의 죽음 등)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아들은 자신이 모든 상황을 잘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아들은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여기고, 한 아내는 자신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현실, 믿고자 하는 사실에만 근거해 작은 사건을 계획하지만, 그 사건은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수많은 변수가 등장하고, 모두가 코너에 몰리고, 적잖이 당황하고,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친다. 그리고 이 모든 잔혹한 결말의 근원은 나는 다 알고 있다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기정사실화되어버린, 신화화 되어버린, 무시무시한 가정에서부터.

그러니 적어도 내 상황만큼은, 나 자신만큼은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 마라. 문제는 무흠무결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100프로 세이프하다고 여기는 순간 어긋나기 시작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그게 세상의 이치. 그렇다고 벌벌 길 것 까지는 없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 만사에 오만한 일, 나는 예외일 거라는 안일한 생각에서부터 의식적으로 벗어나야만 한다. 그것만이 예측할 수 없는 사건사고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최소한의 기제다.

p.s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살을 뺄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 자신감에 반한 팬들이 많으니, 굳이 과감한 체중감량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연기 하나는 끝내주니깐, 투실한 살집도 내공의 펌프가 된다. 왕년의 꽃미남 에단 호크가 몰라보게 살이 빠진 것은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성격의 행크역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가여운 외모를 가질 법도 하다. 연기? , 거의 정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생긴 배우는 연기가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통설도 다 옛말이다. 팔방미인이 판 치는 세상이다. ‘지니역의 마리사 토메이는 얼마 전 <더 레슬러>에서도 으로 열연하더니, 이번 영화에서도 육탄전을 마다치 않는다. 64년생이라는 걸 감안하면, 경의에 찬 박수를 보낸다.

2009/05/26 12:16 2009/05/26 12:16

한국콘텐츠학회 2009 춘계종합학술대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제 부산 신라대학교 동북아비즈니스센터에서 개최된 한국콘텐츠학회 2009 춘계종합학술대회에 다녀왔습니다. 현재 DisCo LabSF연구서』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제 파트의 연구를 바탕으로 문화예술콘텐츠분야에서 발표를 진행했습니다. 비단 저희 CT뿐 아니라, 전국의 많은 예술대학들이 콘텐츠 개발에 있어서 과학기술과의 접목을 꾀함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발표 후에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신 덕에 유익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던 장이기도 했습니다. 제 연구서 주제이기도 한 ‘SF에 등장하는 호모 뮤턴트의 유형과 특성에 대해서만 일단락을 지어보았는데요. 차후 기회가 되면, 다른 내용들 소개해 드릴 수 있는 지면이 허락되면 좋겠습니다.

2009/05/23 18:41 2009/05/23 18:41

강보라의 프랙탈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말이랑 겹치다 보니 핑계 아닌 핑계로 업데이트가 더디게 되었네요. (심심한 사과를) 이미 6편의 주제와 간단한 아이디어 스케치를 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매 회 텅 빈 백지에 무시무시한 커서만이 연신 껌뻑 거리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글 쓰는 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공포!) 아마도 아직까지 연필을 깎아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시는 김훈 선생님과 같은 분들은 느끼지 못하는 구석이 아닐까 하고 감히추측해 봅니다. 이제면 좀 글 쓰는 게 쉬워지려나,했는데 이 모든 잠시의 생각조차 대단한 오만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다시 종아리를 힘차게 내리칩니다. 거울을 닦는 심정으로, 도자기를 빚어 내리는 심정으로, 가마솥 밥을 짓는 심정으로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는 조금이나마 깨닫겠지요. 글쓰기에 있어 마침표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그나마 쉼표도 수십 년을 달려온 이에게만 주어지는 큰 상이라고. 짧은 글 하나 쓰고서는 설이 길었네요. 아무튼 산고 끝에 탄생한 녀석입니다. 물론 더 주물럭거렸으면나은 녀석이 탄생했으리라 믿지만(믿고 싶지만), 만삭둥이가 늘 예쁘란 법은 없으니 이쯤에서 그만 세상에 내 놓아야겠거니 했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읽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바로가기)


Creative Commons License
강보라에 의해 창작된 강보라의 프랙탈 (3) 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05/18 21:23 2009/05/18 21:23

서울재즈페스티벌 2009

서울재즈페스티벌의 세 번째 날 밤 공연. 관련기사의 말마따나 이번 페스티벌 중 가장 기대했던 가치가 있던 공연 둘을 소개하고자 한다. 장장 3시간에 이르는(인터미션 포함) 긴 공연 시간 동안 색은 다르지만,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올곧게 지켜나가는 두 명의 뮤지션을 목도했다는 것 만으로 가슴 벅찰 이유는 충분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amel(left) & Peyroux(right)


1부의 마들렌느 페이루는 목소리와 창법 덕에 2의 빌리 홀리데이라고 불리지만, 정작 받았던 인상은 그 보다는(스탠더드 재즈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면모의 집시와 같은 느낌이었다. 홍보용 사진에서와는 달리 수수하게 긴 머리를 땋아 내리고 자신의 낡은 기타 줄을 조심이 뜯는 모습은 영락없이 불가리아의 작은 소도시에서 만날 법한 떠돌이의 모습이었다. 음악 또한 그 모습을 닮아 소박하고 꾸밈없었는데, 각각의 노래에 대한 설명과 소소한 브릿징 멘트는 오랜 시간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며 하루를 꾸려가는 생활음악인의 면모와 흡사했다.

반면 2부의 바우터 하멜은 그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각종 진귀한 악기(?)를 늘어놓고, 미니확성기까지 동반해 다양한 실험정신을 보여주었던 그에게 젊은 팬들은(특히 정열적인 누나 팬들) 끊임없는 박수갈채를 보내기에 바빴다. 이쁘장한 외모에 어린 나이가 자칫 그의 음악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줄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런 인식을 공연에서 이렇게나 말끔히 씻어버릴 수도 있는 거구나, 싶었다. 한 곡 한 곡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를 어떤 퍼포먼스와 함께 엮으면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그야말로 몸 속에 리듬세포로 가득한 것과 같은 바우터 하멜. 특히 그는 자신의 밴드와 함께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주어 관객을 환호의 도가니로 이끌었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음악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적어도 관객과 직접 만들어가는 공연에서 뮤지션 자신의 것을 일방적으로 전달해주는 반쪽의 것이 아니라,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음악을 통해 당신도 즐겁게 해 드릴게요,라는 마인드로 임하는 공연.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지난 해의 크리스 보티, 그리고 이번 해의 마들렌느 페이루와 바우터 하멜. 매해 진화해가는 서울재즈페스티벌을 보며, 흐뭇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내년엔 누가 오려나)    

Creative Commons License
강보라에 의해 창작된 서울재즈페스티벌2009 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05/17 15:59 2009/05/17 15:59

여자라서 고민돼요

프롤로그

어떤 젠더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면 입을 잘 열지 않는 성격이라(때론 소모적인 논쟁이 난무한다고 생각하기에), ‘여자라서’, ‘여성이어서란 조건을 다는 것도 좀 구차하게 느껴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여자라서 고민된다는 식의 논의를 펴는 것은, 사회구조 상 그리고 젠더 특유의 성질 상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고개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스물의 여자가 다르고 서른의 여자가 다르듯, 여자가 가지게 되는(또는 가질 수 밖에 없는) 고민의 성격도 바뀌게 되어있다. 누군가에겐 굳이 여자여서가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서의문제일 수도 있겠다. 이러나 저러나 고민이 되는 건 이성이 달린 슬픈 동물인 까닭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 길을 막는 건 바로 너야

최초라는 수식어를 다는 것은 원조라는 수식어를 다는 것만큼이나 부담이 되는 일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지만, 작은 예술학교의 최초의 여성총학생회장 당선’, 그리고 최초의 여성러닝메이트 당선이란 꼬리표는 들리는 것만큼이나 거룩하고 영예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학생회 일이 한창이던 때, 여지없이 봄날의 축제는 시작되었고 그 기간 동안 같은 공간을 사용하고자 했던 한 과목의 교수님과 맞닥뜨리던 순간,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어머, 여학생들이 이끄는 총학이라니, 얼마나 고무적인지 모르겠네요.” 생글거리는 말문을 트고 난 이후에도 그 고무적인 성과에 대해서 한참을 떠드시더니, 결국은 고무적인 성과를 낸 여성회장단에게 내가 쓸 자리니 물러나라고 물러서지 않는 여성적 전투성을 몸소 체험케 해 주셨다. 물론 두 가지 일은 성격이 다르기에 하나의 사안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 최소한 고무적인 성과에 대한 포문은 아예 열지 않았던 게, 같은 여성vs여성의 대화에서 훨씬 덜 비겁해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굳이 매사에 그 공식이 들어맞지 않았으면 하지만, 정치적인 여자의 적은 정치적인 여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 때 미처 못한 말: 난 당신을 위해 고무적이고 싶진 않군요.)   

괜찮아, 이것 봐, 얼마나 근사하니

아이러니는 여자의 적뿐 아니라 여자의 친구도, 그것도 최고의 친구도 여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얼마 전, 작지만 실속 있는 전시회를 앞두고 고민하고 있는 작가 친구를 만났다. 공모 데드라인에 맞추어 전시컨셉을 잡기는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설치해야 하는 날짜는 다가오고, 기대하는 주변인은 많고, 시시한 작품을 내고 싶지는 않고,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스물 넷의 친구였다. 조언을 듣고 싶다는 말에 작업실을 찾아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친구는 그래, 언니가 해주는 말이 필요했어라며 구겨진 인상을 조금 풀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예술의 문제에 있어서 타인이 구체적인 답변을 해주기는 어렵다. 나의 경우도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언니또는 같은 여자친구로서의 심정적 지원은 때론 남자친구의 그것보다도 부모의 그것보다도 더 가깝고 에너제틱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여자는 여자의 자신감, 그리고 자존심의 영역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줄 수도 누구보다 더 다치게 할 수도 있다. 결국은 양날의 칼을 모든 여자들이 서로를 향해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글쎄. 그건 비단 젠더의 생리이지, 좋고 싫고 또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여자가 듣고 싶어하는 건 (물론 남자의 경우에도 상이하다고 믿지는 않는다), 결국 괜찮아’, ‘좋다’, ‘이해한다’, ‘그래’. 때때론 참 근사하다란 말일 게다. 어렵지 않다고? 곰곰이 돌아보라. 스스로 얼마나 자주 이런 말을 했는가를 말이다.   

결국은 ‘우리의’ 문제더라

일전에 EBS의 간부직에 계시던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10년 후 이력서를 한 번 써보라고 하셨다. 상상의 나래를 편 채, (당시 로스쿨 문제로 한창 시끄러웠다) 5년 후 로스쿨 졸업, 이후 방송통신법 관련 전문변호사 따위의 내용을 가득 채웠었는데, 돌아온 건 한 마디 질타. “어떻게 개인적인 삶은 그렇게 쏙 빠졌어?” 당시에는 누가 감히 이력서에 결혼, 출산 등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를 쓰겠나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누가 보기에도 부러워할 만한 이력서를 써 가지고 오라는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삶에 대한 고찰, 계획에 대한 재고에 대해 찬찬히 훑어보라고 주신 시간이었던 듯. 그걸 서른의 문턱에 서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요지경 같은 요즘 세상에선 시원한 정답이 없다. 결혼을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 일을 해도 문제, 놀아도 문제, 살아도 문제, 죽어도 문제. 모순 투성이라, 굳이 하나를 쭉 밀고 나가는 게 쉽지 않다는 거다. 최근엔 자연스레 결혼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는데, 그게 굳이 나만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더라는 게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그래도 결국 인간은 혼자가 아니더냐, 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본질적으로 나와 너의 문제이지 오롯이 나만의 문제로 끝나지 못한다. 그런 속성을 생각할 때, 나만을 위해 공부하고, 나만을 위해 결혼하고 나만을 위해 자아성취를 하지는 않는 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에서부터 코스모스라는 큰 사회에 이르기까지 범위의 문제이지, 결국은 그 안의 나이기 때문에 내일이 있고, 그 다음이 있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나, 여성의 문제도 너, 우리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다시 우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에필로그, 차마

위의 상황들은 모두 현재진행형이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란 거다. 그리고 아마 여기에서 이란 영영 없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자라서 고민되는 문제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원망도 해보고,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가 아닌 무엇이 되던 간에 문제들은 산재해 있다. 과거 사회에 비하면 그 문제들이 적어졌다고는 하지만, 난 다르게 생각한다. 문제의 양이 아닌 성질의 문제다. 과거의 문제와 오늘의 문제는 그 성격이 바뀐 것이다. 그렇기에 고민의 시기는 달라졌을 지 언정, 총체적인 스트레스는 유사하다. 그러나 젠더가 이미 숙명이라고 한다면, 그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대한 조화롭게 해결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힘든가? 포기하고 싶은가? 우리를 좌절시킬 만한 이야기들은 무궁무진하다. 이 와중에도 힘이 되는 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무수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힘이 되는 건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란 거다. , 해낼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여자여, 일어나라. 그리고 함께 걸어가라. 그대는 강하다.  

Creative Commons License
강보라에 의해 창작된 여자라서 고민돼요 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05/15 12:51 2009/05/15 12:51

과학보다 예술!

사용자 삽입 이미지

pic from flickr


매니지먼트에 예술적인 요소를 접목한 사례를 보여주는 동아비즈니스리뷰의 기사를 읽다가, 원본이 되는 HBR기사를 함께 찾아 읽었습니다. 예술경영이 국내에 소개된 지도 꽤 되었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는 부분은 (비단 이 분야만의 문제는 아니겠습니다만) 정통 fine art management 전공자가 각자의 영역에 계속 발을 담고 있으면서 서로의 영역에 관심을 갖거나, 일반 경영인이 예술의 한 부분을 차용하는 데서 쌓은 노하우, 또는 예술가가 자신의 팀/그룹을 꾸려가면서 기타 기업이나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 등이 어쩌면 오늘날 예술경영이라고 총칭하는 것들을 실질적으로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물론 예술경영자들은 무슨 소리냐,며 버럭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요.) 물론 중첩되는 부분들이 분명 존재하기에 예술을 위한 경영법이 생겨나는 것이겠지만, 세월이 좀 지나다 보니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는 생각이 짙어지네요. 융합, 학제간 협력, 통섭 등 뭐 듣기 좋은 말들은 많습니다만, 결국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해 만감이 교차하는 시점입니다. 덤으로 얼마 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에서 열린 통합적 학문과 관련된 자료도 함께 링크합니다.

2009/05/05 22:09 2009/05/05 2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