꾼의 변

우리의 고매한 국어사전에 의하면 ‘꾼’이란 어떤 일, 특히 즐기는 방면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하긴 대부분 ‘꾼’이란 접미사를 붙이는 것들을 보면 사기꾼, 술꾼, 도박꾼처럼 좋지 않은 경우가 많긴 하다. 하지만 반대로 나무꾼, 춤 꾼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긴 하다. 나의 경우에 ‘꾼’이란 ‘선수’와 동의어다. 있어 보이게 말하자면, ‘프로’ 또는 ‘전문가’와 동의어란 거다. 내게 있어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보다는 ‘당신은 어떤 꾼입니까’라는 질문이 훨씬 도전적이다. 전자는 추상적이고 미래지향적이지만, 후자는 구체적이고 현재집중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너는 어떤 꾼이냐’고 물었을 때, 조심스레 말문을 트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야기꾼 입니다.”라고. 내게 있어 이야기는 단순히 픽션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요, 스토리의 한국어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넓고도 유연한 개념이다. ‘스토리텔링’이란 단어가 판을 치는 형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게 대체 뭐냐’고 했을 때 시원스레(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답을 해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장사치들만이 득실거렸다. 관광지를 조성하기 위해 만드는 설탕발림 정도로 이야기를 추락시킬 마음은 없다. 또 특정기업의 과오를 덮어주고, 이미지를 향상시켜주기 위한 ‘딱갈이’ 노릇도 하고 싶지 않다. 이야기꾼이란 자신이 보는 현실을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이다. 저널리스트요, 작가이자, 비평가 또 창작가인 것이다. 장르를 잡식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재생산해내는 이인 것이다.
나는 글쓰기 작업이 어디서 시작되건 결국은 순수한 나만의 시각으로 파헤쳐진 창작의 연장이라고 자부한다. 촘촘히 연계된 네트워크 안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방식, 무의미를 유의미로 탈바꿈시키는 방식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 영감과 감흥은 허공에 떠다니지 않는다. 자극은 외부에서 오기도하지만, 내부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내부에 집중한다. 그 목소리를 듣는다. 정제될 때까지, 나만의 언어, 나만의 이야기가 되는 지점까지. 그 다음에야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한다. 벅차 오르는 가슴을 안고.
꾼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열정을 요구한다. 동시에 인내와 재능도 겸비해야 한다. ‘은둔 작가’로 잘 알려진 일본의 마루야마 겐지는 이렇게 말한다. “창작이란 고(孤)의 자세로 정신의 깊은 곳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꾼은 먹고 사는 문제와 전면적으로 부딪혀야 한다. 다른 루트를 통해 안정적으로 삶이 보장되는 순간, 꾼은 사라진다. 가난과 시련,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이는 그 경험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들이 증발하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꾼이 아니다. 삶과 투쟁하되, 그 안에서 고귀함은 잃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시계에 세계의 시계를 맞추어야 한다. 톨스토이가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 답했다. “나는 언제나 생각합니다. 작가는 할 말이 있을 때 써야 한다. 머리가 성숙해졌을 때 그것을 종이에 옮겨야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내가 반드시 3월이나 10월에 잡지를 위해 글을 써야 하지요?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꾼’이란 한 자를 짊어지려고 하니 어깨가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단순히 직업이 아닌, 소명을 찾아나선다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가볍다. 입과 손이 근질거리는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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