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오늘의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불확실한 것들과의 전쟁을 뜻한다. 경험은 확신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불확실성에 대한 가능성을 축소한다. 그뿐이다. 현상이든 사람이든 확실한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이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 모르겠다는 답보다 덜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에 대다수에 의해 자주 사용되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맹점과 유사하다. 다수에 의해 바보스러운 결정을 내리고, 그를 맹신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오만과 편견을 남발한다. 그것도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나는 오늘 여러 번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바닥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왼쪽에 놓인 식물의 잎사귀는 어떤 매끌매끌한지, 찻잔에는 손잡이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젓기를 여러 번. 안전한 곳인지 또는 그렇지 못한 곳인지 알아보기 위해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손바닥을 탁탁거렸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신경이 곤두서는 곳. 눈을 뜨나 감으나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휘감은 곳. 끊임없는 하울링으로 순간적 공감각을 잃은 곳. 1시간이 20분으로 둔갑한 새로운 시간의 개념이 형성된 곳.

바로 <어둠속의 대화 Dialogue in the dark>였다. (전시 투어의 상세내용은 관련 기사 1+2를 참고하시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http://blog.naver.com/ximon1



60분 남짓 어둠 속의 세상살이를 흉내내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길고도 짧은 시공간을 지나니 당연시 되어왔던 것에 대한 허울은 한 꺼풀 벗겨내기에 충분했다. 현재의 시스템은 비장애인=정상인이란 도식아래 독재적이라 일컬을 수 있을 만큼 일괄적으로 정교히 설계되어있고, 다수의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에 동승할 수 없도록 경계가 쳐져 있다. 엄호되는 바운더리 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에 안도의 한 숨이라도 내쉬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짧은 경험을 가지고 온갖 호들갑을 떠는 자신에 대해 값싼 동정이라도 선물해야 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온갖 모순이 존재의 성을 둘러싸고 어지럽혀도 담담히 안의 광경을 들여다보는 게 맞을 것이다. <어둠속의 대화>가 비단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한 새로운 대화법만을 뜻하지는 않음을, 오감을 넘어서는 존재에 대한 경이, 그리고 그 어둡기에 찬란한 상상의 세계에 대한 찬미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리라.

 

본다는 행위에 대해 진지한 재고를 감행할 때다. 경험하지 않은 자, 느끼지 못하는 자, 그대는 입을 열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대에게 생의 불확실성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으리라. ‘어둠대화도 그를 진정으로 아는이들의 전유물이니, 그대 부끄러운 볼을 여미고 떠나라. ‘오만과 편견이라는 네버엔딩의 세계로




2008/08/25 22:53 2008/08/25 22:53

Trackback URL : http://borakang.com/tt/trackback/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