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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 해당하는 글들

  1. 2009/08/29  WEB 그릇에 음식 담기 (2)
  2. 2009/08/13  2009 좋은 방송을 위한 시민의 비평상 수상집 (2)
  3. 2009/07/06  제12회 좋은 방송을 위한 시민의 비평상 (6)
  4. 2009/07/03  설탕물 묻힌 과학
  5. 2009/05/17  서울재즈페스티벌 2009 (3)
  6. 2008/11/04  축! 감성정치 르네상스
  7. 2008/09/28  스승과 제자 (2)
  8. 2008/09/27  광주비엔날레 2008 (1)
  9. 2008/08/29  Pi-Male-List (1)
  10. 2008/08/28  리듬 타는 책임감

WEB 그릇에 음식 담기

열정은 가득했지만, 재능은 부족했던 영화학도 친구는 유난히 음식과 그릇의 궁합에 관심이 많았다. 마리아쥬란 비단 와인과 음식 간에만 형성되는 궁합은 아니라며, 어떤 그릇에 어떤 음식을 담느냐가 천지 차이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 말을 되새기며 음식을 할 때마다 새삼 깨닫는 바는 만드는 이의 고민이 생각보다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똑 같은 원리는 오프라인 상에서뿐 아니라, 온라인에도 적용될 수 있다. 웹을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그릇에 비유해 보자. 그리고 그 안에 담기는 음식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그릇과의 조화는 어떻게 이뤄져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한국의 웹 기술과 문화는 그 어느 나라의 것에도 뒤쳐지지 않는 것이라 자부했지만, 이제는 기술과 문화 그 무엇 하나 독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기술적 디자인과 내용적 디자인이 어떤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자.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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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의 경우에도 사이드바에 어쩔 수 없이 광고를 배치하고 있지만, 그 외에는 소위 말하는 낚시용광고(대부분 선정적인 이미지와 제목으로 기사 양쪽을 차지하고 드래그 시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외의 멀티미디어나 슬라이드 쇼도 기사 내용이나 카테고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정보 위주로 노출되어 있고, 많이 읽은 기사 등의 순위도 센세이션과는 거리가 먼 내용으로 정론지로서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신문&TV가 디지털미디어와의 전쟁에서 택한 고육지책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CBS 케이티 쿠릭 기용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가 씁쓸하다. 관련기사보기)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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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도 텍스트큐브가 제공하는 설치형 블로그를 사용하고 있지만, 한국적 스타일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최근 구글 리더에서 제공한 유명인들의 RSS를 통해 알게 된 한 프랑스 블로그의 기술&콘텐츠 디자인에 매료되었다. 달력과 아카이브, 키워드 등을 모두 사이드바에 배치하고 5-6개의 포스팅만을 볼 수 있게 하여 집중력을 높인 이 블로그는 전체적인 색감과 로고, 타이포와 포스팅의 내용 등이 무리 없이 조화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음식과 라이프스타일을 동시에 전달하는 만큼 블로그 표지에서부터 자신만의 전문성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한국형 설치형 블로그는 개인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창구가 많지 않다. 물론 블로거 개개인이 자신의 필요에 맞게 코딩을 한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블로거들 스스로도 한국신문의 경우와 같이 불필요한 위젯과 광고를 경쟁적으로 배치하는 경향이 있어 자칫 통일감과 집중력을 흐리는 경향이 있다. 대안을 모색하는 새로운 설치형 블로그를 소개한다. 바로가기)

p.s Cultura Scope(이하 CS)의 트위터를 개설했다. 나름의 청개구리 심보에 오랫동안 지인들의 제안을 거부해오다, 직접적인 트위터로의 인도(!)가 있어 입문하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 그 위력을 맛보긴 힘들었지만, 떠들어대던 매력이 무엇인지는 조금 알 것 같다. 다만 최근 트위터의 내용이 신변잡기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에 실망했고, 김주하 앵커와 같은 유명인은 following대비 follower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에 절망했을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follawing 1이라는 한층 엄격한 사실!) 기술적 문제가 있어 일단 위젯으로 설치하지 못하고, 오른편 사이드 바에 아웃링크를 걸어놓았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고고고)  

 

2009/08/29 00:02 2009/08/29 00:02

2009 좋은 방송을 위한 시민의 비평상 수상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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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광고했던 비평상 수상집이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뭐 가격대가 조금 만만치 않아 대중성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겠지만, 도서관 자주 가시는 분들은 빌려서라도 보시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올 해는 역시 여성을 다루는 프로그램에 대한 비평이 많았던 것이 눈에 띕니다. 지금도 일주일 내내 공주엣지녀들의 등쌀에 못 살아남을 것 같으니, 당분간 언니들에 대한 논의는 끊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 글 여자, 섬 밖으로 나오다또한 드라마 속 여성을 다루고 있으니,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네요. 아무튼 오며 가며 이런 저런 성원 부탁 드립니다. (꾸벅)  

2009/08/13 08:00 2009/08/13 08:00

제12회 좋은 방송을 위한 시민의 비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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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과욕이었나. 2년 전에 수상한 이력 때문에 올 해 다시 수상대열에 합류하는 것은 무리였나 보다. (, 글 수준이 좀 떨어진 까닭도 있겠지만 후후) 아무튼 비평수상작들을 모은 수상집이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그러한 연유에 비평문은 안타깝게 블로그에 올릴 수는 없겠지만, 몇 권 받으면 관심 있는 이들에게 돌려볼 요량. TV 비평의 시선 안에 들어오는 작품들은 얼추 비슷한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소재들도 꽤 눈에 띄었고, 이렇게나마 TV비평의 장이 넓혀진 것에 대해 뿌듯한 감마저 든다. 특히 올 해의 비평작 경향은 여성으로 많이 몰렸는데, <아내의 유혹>, <내조의 여왕> 등 여성이 주축을 이룬 작품들을 다룬 비평이 꽤 있었고, 나 또한 <엄마가 뿔났다> <달콤한 나의 도시> 속 여성 주인공을 비교한 비평문을 냈다. 알파걸과 슈퍼우먼, 억센 엄마와 아줌마가 TV문화 전면으로 나온 것은 실생활과는 관련 없이 무척 고무적이다. 상대적으로 남성들이 많은 소외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오랫동안 가정과 관습, 스스로 안에 갇혀있던 여성 캐릭터들이 사회와 정정당당히 승부를 하는 모습은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그 외에도 <라라라> <다큐프라임>처럼 비평할 만한 요소가 무궁무진한 양질의 작품들이 그 대상에 올라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척박했던 한국의 비평문화도 이 공모전의 이름처럼 모든 이들이 함께 쌓아갈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면 한다. (, 높이 올라가지 못했어도 만족스럽긴 처음이다. 좋은 '동지'가 많이 생긴 까닭일까.) >공모 수상작 리스트

2009/07/06 12:11 2009/07/06 12:11

설탕물 묻힌 과학

과학은 본디 썼다. 재미없는 실험과 무작정 외는 공식으로 기억되는 어린 시절의 과학은 쓴 맛이었다. 과학을 좋아했던 몇몇 무서운 친구들과 색다르게 설명해 보고자 했던 노력이 전혀 없던 몇몇 과학선생님들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이튠즈를 통해 MIT의 유명한 물리학 교수의 수업을 접했던 한 친구는 장성해서야 이렇게 재밌는 분야가 있었는지 몰랐다며 한탄 아닌 한탄을 늘어놓았다. 그렇다. 이전의 과학은 편식하는 아이를 둔 엄마의 입장이었다. 우리 아이가 안 먹는 이유가 엄마의 음식솜씨 때문인지도, 그릇된 식생활 지도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몰랐다. 무조건 아이 탓을 했다. 물론 여러 음식을 잘 먹어보지 않으려는 아이 탓도 있겠지만, 아이는 어디까지나 아이다. 맛있게, 먹고 싶게 해줘야 먹는다. 그렇게 쓰디 썼던 과학이 달콤해지려고 한다. 나도 알고 보면 꽤 달아-하고 손짓한다. 그렇게 투정을 부렸던 아이어른까지도 고개를 돌린다. , 할 수 있었는데-왜 이제야 달콤해진 건지 야속하기만 하다.

#1 쉬운 과학적 글쓰기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와 과학저술가 하리하라(필명)는 쉬운 과학적 글쓰기의 대표주자이다. 정 교수의 그 유명한 <과학콘서트>는 최고의 스테디셀러로 기록되었고, 하리하라는 <과학 읽어주는 여자>등을 위시로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끊임없는 글쓰기로 그 이름을 알린 지 오래다. 이들의 출현 이후 수많은 과학자들이 대중을 위한 과학서적을 출판하고 있지만, 성적은 저조하다. 물론 양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면 질적인 성장도 따라온다는 게 출판계의 공식이지만, 글쓰기-특히 대중을 위한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작가들이 무작정 뛰어들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 그래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학계, 정부부처, 교육기관이 모두 나서 육성해나가야 할 과제다.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기’-철옹성의 시대는 끝났다. 어렵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만, 쉽게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 드문 시대이기에 이들의 선전은 그 어느 때보다 반갑다.  

#2 다채로운 볼거리의 과학 프로

KBS1 <과학까페>가 단연 돋보인다. 토요일 저녁 프라임 시간대에 방송되는 이 프로그램의 진수는 뭐니뭐니해도 적절한 주제선정과 다채로운 볼거리에 있다. 날로 성장하는 컴퓨터그래픽의 향연은 이해를 한층 드높인다. YTN사이언스 TV <KISTI의 과학향기>도 돋보인다. KISTI는 동일한 이름의 웹진도 발행 중이다. ‘게임도 하고 건강검진도 받고와 같은 기사는 건강을 위한 기능성게임을 생활실례에 빗대어 작성해 읽기 수월하다. 더 이상 BBC의 다큐 채널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이치를 하나 둘씩 깨우쳐주는 과학 프로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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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풍자되는 과학도

CBS의 시트콤 <The big bang theory>는 입소문 탄 지 오래되어 소개하는 것조차 민망하지만. 작가들의 직간접적 경험을 토대로 한 실감나는 상황연출 덕에 과학도 돌+I’들을 낄낄거리며 마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과학도들조차 배꼽을 쥐며, 자조할 수 있는 시트콤이기에 전 계층에게 추천한다. ‘나 공부 깨나 했어하시는 분들에게는 (심지어) 강추한다. (많이 아는 것도, 똑똑하고 잘난 것도 중요하기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초월해 스스로를 희화화할 수 있는 힘에 감탄하곤 한다. 잘났는데 심지어 유머러스하다니. 세상은 좀 불공평한 구석이 있다.)   

2009/07/03 12:02 2009/07/03 12:02

서울재즈페스티벌 2009

서울재즈페스티벌의 세 번째 날 밤 공연. 관련기사의 말마따나 이번 페스티벌 중 가장 기대했던 가치가 있던 공연 둘을 소개하고자 한다. 장장 3시간에 이르는(인터미션 포함) 긴 공연 시간 동안 색은 다르지만,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올곧게 지켜나가는 두 명의 뮤지션을 목도했다는 것 만으로 가슴 벅찰 이유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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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mel(left) & Peyroux(right)


1부의 마들렌느 페이루는 목소리와 창법 덕에 2의 빌리 홀리데이라고 불리지만, 정작 받았던 인상은 그 보다는(스탠더드 재즈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면모의 집시와 같은 느낌이었다. 홍보용 사진에서와는 달리 수수하게 긴 머리를 땋아 내리고 자신의 낡은 기타 줄을 조심이 뜯는 모습은 영락없이 불가리아의 작은 소도시에서 만날 법한 떠돌이의 모습이었다. 음악 또한 그 모습을 닮아 소박하고 꾸밈없었는데, 각각의 노래에 대한 설명과 소소한 브릿징 멘트는 오랜 시간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며 하루를 꾸려가는 생활음악인의 면모와 흡사했다.

반면 2부의 바우터 하멜은 그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각종 진귀한 악기(?)를 늘어놓고, 미니확성기까지 동반해 다양한 실험정신을 보여주었던 그에게 젊은 팬들은(특히 정열적인 누나 팬들) 끊임없는 박수갈채를 보내기에 바빴다. 이쁘장한 외모에 어린 나이가 자칫 그의 음악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줄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런 인식을 공연에서 이렇게나 말끔히 씻어버릴 수도 있는 거구나, 싶었다. 한 곡 한 곡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를 어떤 퍼포먼스와 함께 엮으면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그야말로 몸 속에 리듬세포로 가득한 것과 같은 바우터 하멜. 특히 그는 자신의 밴드와 함께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주어 관객을 환호의 도가니로 이끌었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음악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적어도 관객과 직접 만들어가는 공연에서 뮤지션 자신의 것을 일방적으로 전달해주는 반쪽의 것이 아니라,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음악을 통해 당신도 즐겁게 해 드릴게요,라는 마인드로 임하는 공연.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지난 해의 크리스 보티, 그리고 이번 해의 마들렌느 페이루와 바우터 하멜. 매해 진화해가는 서울재즈페스티벌을 보며, 흐뭇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내년엔 누가 오려나)    

Creative Commons License
강보라에 의해 창작된 서울재즈페스티벌2009 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05/17 15:59 2009/05/17 15:59

축! 감성정치 르네상스

시작은 이러했다.

인간의 의지에 따른 행위의 자유는 그의 고유한 이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이성은 인간 스스로를 구성해가는 규칙을 형성하고,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의한 자유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가늠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중세사상가이자 정치철학자였던 존 로크가 굳이 이성의 우월성 또는 절대성에 대해 강조하지 않았더라도 서양철학사에서 이성이 차지하는 위치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이성이 아닌 감성에 의지한다는 것은 대부분 무언가 미천한 것으로써, ‘감상에 빠지다와 같은 비아냥거림을 받기 일쑤인 그런 성격의 것이었다. 불완전하고 카오스적이며, 명확하지 않으면서 심지어 변덕스럽기까지 한 감성이란 요물에 영혼을 파는 것은 신경질적인 예술가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행위였다. 감성정치? 웃기는 얘기다. 적어도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렇다.

1988년 미 대선, 당시 여론조사에서 상대후보보다 20퍼센트나 앞서가던 민주당의 마이클 S. 듀카키스 후보가 버나드 쇼를 만났다.

버나드 쇼(진행자): (당시) 주지사님, 만약 키티 듀카키스(그의 아내)가 납치당한 후 죽임을 당했다면 당신은 그 살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시겠습니까?

마이클 S. 듀카키스: 아니요, 버나드. 저는 제 전 생애를 걸쳐 사형제도에 반대해 왔습니다. 그 방지책에 대해 어떤 근거도 찾지 못하겠군요. 저는 흉악범죄를 다스리는 데 사형제도 말고 더 효과적인 방안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토크쇼 이후 듀카키스는 순식간에 우위를 빼앗겼다. 그가 자신의 신념에 근거한 명확한 입장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성적으로 잘못된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쇼가 기대했던 건 아마도 그의 감성에 대한 가감 없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듀카키스는 자신의 부인을 죽인 살인마에게 당연히 사형에 처하겠다고 답한 대신,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서 고수한 정책적 가치를 최우선 순위에 둔 것이다. 결국 이 토크쇼를 지켜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듀카키스의 대답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과연 사람일까’. ‘그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일까’. ‘그는 과연 내가 신뢰하고 지향하는 가치를 대변할 수 있는 대통령으로서 적합한 사람일까’. 이와 같은 의문에 듀카키스는 확신을 주지 못했고, 결국 그는 대선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감성정치의 일면이 드러난 셈이다. 보통 사람들은 정치의 이성적인 면모보다는 소소한 감성적 코드에 더 깊고 내밀한 개입의 성향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뇌 과학에서는 뇌와 감성의 관계에 대해 지속적인 연구를 벌여왔다. 정치 심리학자인 드류 웨스턴의 책 「정치적 뇌」에서 저자는 뇌가 정보와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협상을 한다고 말한다. , 정보가 욕망과 결합하면 정치적 뇌는 어떻게 해서든 인간이 욕망했던 결론을 향해 나름의 이성을 주조해낸다는 것이다. 뇌가 비단 이성적이냐 감성적이냐는 논쟁을 떠나서 자칫 이성적으로 보이기 쉬운 결정들도 대부분은 욕망과 결합한 감성적 판단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특히 정치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굳이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정치에서 감성은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올해 초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힐러리가 흘린 두 번의 눈물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녀의 첫 번째 눈물은 동정을 자아냈지만, 두 번째 눈물은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정치인들의 눈물 한 방울, 한 방울 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라는 조건이 달리기 때문이다. 감성()은 개인의 표현 양식 중 하나지만, 정치에서 그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양해진다. 본래의 의도는 중요치 않다. 그것이 사후에 어떻게 해석되느냐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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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7월 존 케리를 대선 후보로 지명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한 번의 연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버락 오바마(당시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출마)에게는 하나의 절대적인 옵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원했고, 그것이 결국 자신의 미국, 미국의 삶에 대한 대안 없는 선택이라고 믿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그의 접근법에 지나치게 감성적이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하지만, ‘자신과 유사한 인물, 자신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후보를 찾는 미국 유권자들에게 이보다 더 탁월한 호소는 없는 듯 보였다. 민주당 마지막 전당대회 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는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연설을 한 지 꼭 45년째 되던 날, 오바마는 그의 또 다른 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양한 인종문화적 체험을 쌓아온 삶을 통틀어 스스로 작은 미국임을 강조했던 그가 약속한 은 이성적 선상에서만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고백적 어투와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어쩌면 고도로 훈련되었을 지 모를) 진정성은, 적어도 듣는 이의 감정을 동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매케인에 비해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오바마는 줄곧 감성적 전략을 취한다. ‘그래요. 나는 어쩌면 (정치에 대해) 아직 잘 모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난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는 그 말을 우회적으로 ‘Yes, We Can’으로 치환한다. 그럼으로 인해우리를 잃어버린 사람들과우리를 이루는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민주주의’, ‘미국’, ‘미래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란 구호를 외치게 하는 것이다. 비록 그 민주주의가, 그 미국이, 그리고 또 그 미래가 그리 밝지만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처칠이 지적했듯이제껏 시도된 모든 체제를 제외하고 민주주의는 가장 나쁜 정치체제일는지 모른다. 이성적 판단을 배제한 상태에서 다수가 감정을 좇아 (대선과 같은) 국가적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많은 정치체제 안에서 다분히감정과 연루된 결정들이 이뤄졌고, 그를 통해 역사는 피를 흘리기도 성장을 경험하기도 했던 것 아닌가. 이성과 감성 중 무엇이 더 우월하냐는 지지부진한 논쟁은 근대 이전으로 덮어두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이성을 움직이는 건 단연 합리적인 요소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한층 나아가 감성이 작동하는 데 이성적인 요소가 적절히 배치될 때 한층 임팩트 있는 전달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감성정치는 이러한 감성과 이성 간의 관계학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사회의 불안정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덩달아 그 불안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보라색이 커밍 쑨 코드로 점쳐지고, 그 덕에 조만간 온 도시가 보랏빛 물결로 뒤덮일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 다소 소름 끼치는 광경이지만, 감성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 어떤 사회과학적인 접근방법으로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짜릿하지만, 이내 절망감을 안겨준다. 그 어떤 성공모델도 그 어떤 가이드라인도 없기 때문이다. 이성이 최고의 덕목으로 꼽히던 시대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로 감으로 때리는 식의 시도들이 횡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 좋은 사람이 선봉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정치가 대중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모양새도 비슷해졌다. 학식이 많고, 경험이 많은 것은 관련 서적에서나 늘어놓을만한 얘기가 되었다. 이성적 데이터보다는 감성적 결정력을 응집하는데 더 많은 전략가들이 몰려들어야 한다. 숫자보다는 이미지 하나가 개개인의 심장뿐 아니라 뇌까지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현욱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덕훈씨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중략)

사랑은 리얼이고 필링이고 터치지요.”

이를 빌어 정치에 대해서도 재정의해 볼 수 있겠다. ‘정치는 이제 리얼이고 필링이고 터치라고 말이다. 나아가 수 백 년의 정치사를 뒤집을 만한 주장도 가능할 게다. 지금껏 인류는 단 한 번도 전적으로 이성에 근거한 정치적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고. 모든 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사사로운 감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감성정치는 막 시작된 게 아니다. 오래 전부터 그렇게 있어왔던 것이다. 그저 시대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나, 인지하지 못했을 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현대인은 더 이상 냉소의 바지자락을 잡고 있지 않다. 리얼하고 필링으로 통하는 무언가와 터치를 하고 싶을 뿐이다. ! 감성정치 르네상스.

* 이 글은 어제 마감된 <GQ KOREA CRITIC AWARD 2008 >에 공모한
대중문화비평입니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전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08/11/04 09:30 2008/11/04 09:30

스승과 제자

통상적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로 이해되지만,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는 수평적인 관계, 나아가 쌍방향적인 관계일 때가 있다. 먼저 난 자로서 스승’, 나중 된 자로서 제자로 명명되었을 뿐이지, 말 그대로 청출어람을 몸소 보여주는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최근 수목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두 편의 드라마, MBC <베토벤 바이러스> SBS <바람의 화원>은 이와 같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특히 음악과 미술이라는 장르 안에서 벌어지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다른 분야의 그것보다 민감하게 작동할 수밖에 없다. 예술인의 특성 상 타인의 재능을 쉽게 감지할 수 있고, 반사적으로 그를 경계하게 된다.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경이로우면서도 두려운 무언가 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이 좁은 만큼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도 그 까닭이겠지만,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직업이기에 그를 위협하는 존재는 당연히 껄끄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 가 살리에르 증후군을 앓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 가운에서도 영감의 끈이 오고 가고 자신 이외에 가장 큰 라이벌과의 한판 승부도 기대해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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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 분)와 강건우(장근석 분)의 관계는 위의 공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철저한 노력파로서 천재적 기질을 보였던 평생 라이벌에게 뒤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굳히는 강마에에게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뛰어난 연주실력을 보여주는 강건우의 존재는 살아있는 트라우마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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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에서의 김홍도(박신양 분)와 신윤복(문근영 분)의 대결구도도 유사하다. 픽션이 많이 가미되었지만 동시대를 풍미한 두 화원의 엇갈리는 운명이 스승과 제자, 남자와 여자, 인정받은 예술가와 그렇지 못한 예술가로 대비된다. 신윤복의 당돌함에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김홍도는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두 드라마는 서양의 음악과 동양의 미술이라는 어찌보면 판이하게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그를 관통하는 천재와 천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강마에나 김홍도 모두 자신의 재능을 둘러싼 상처를 간직하고 있고, 현재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방어책을 고수한다. 그래서인지 공통적으로 괴팍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에 반해 그들의 제자들은 자신이 보고 느끼는 대로 솔직히 표현하고 지칠 줄 모르는 순수한 열정을 보여준다. 그것이 때때로 (상대적으로) 늙은 스승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숨 조임으로 다가오는 지 모르고 말이다.

언젠가 들었던 일화가 있다. 현재 국내에서 최고의 지휘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는 자신의 제자에게 절대 ‘100%’를 전수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뭐 그리 쪼잔한 이가 다 있나 했지만, 동종분야의 이들은 이를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치열한 밥 그릇 싸움에서 밀려나기란 시간문제라는 이유였다. 뭐 사정이야 제 각각이겠지만, 조금 더 훈훈한 분위기 안에서의 교감이 오간다면 좋을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예전에 감탄했었던 한 연주를 소개하고자 한다. 재미교포 재즈 색소폰주자로 떠오르고 있는 그레이스 켈리(16)가 기타리스트 대가 러셀 멜론과 함께 한 연주실황을 포스팅한다. 그녀에 관한 최근 기사도 여기에 같이 올린다.

2008/09/28 17:34 2008/09/28 17:34

광주비엔날레 2008

지난 25광주 비엔날레에 다녀왔다. 예년보다 내용면에서 많이 부실해진 면모가 눈에 띄었다. 속사정이야 잘 모르겠지만, 예상컨대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부산비엔날레가 동시에 열리고 있어 작가 선정에 치열한 물밑경쟁이 있었던 까닭이 아닐까 싶다. 비교적 한산했던 방문일에는 몇몇 학교단체와 지자체의 방문, 소수의 민간방문객이 있었다. 12,000원의(성인기준) 입장료를 내면 비엔날레관을 비롯하여 의재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대인시장, 광주극장 등 5군데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다른 행사를 참관할 수 있다. 주전시관인 비엔날레관에서 눈에 띈 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의 작가나 그 지역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 많았다는 것인데, 연례적인 수준에 비해 조금 뒤쳐진 듯했다. 몇 개의 설치작품, 미디어아트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사진이나 파인아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전시관은 작품수준 이외에도 전시관 설비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하에 내려가면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쾌적하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냈고, 암실 전시 등을 보고 나오면 눈이 따끔거리는 등 통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에 비해 주전시관 뒤쪽에 위치한 광주시립미술관 내에서의 전시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2년 전 여름 마드리드의 한 미술관에서 보았던 ‘Gordon Matta-Clark’의 전시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기획 아래 진행되고 있었고, 홍콩/대만 등지의 작가들이 감각을 이용한 인터랙티브 전시는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잡아두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시간관계상 급하게 방문했던 비엔날레 투어 중 마지막 목적지는 바로 대인시장이었다. 광주 도심의 충장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대인시장은 예전에는 활발하게 운영되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여느 재래시장처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광주 비엔날레에서는 이러한 재래시장을 전시의 한 공간으로 설정하고 일상 속의 미술을 지향했다. 재래시장 내 간간이 빈 상점공간을 대여해 작가들이 입주, 작품활동을 하는 형태를 띤 것이다. 몇몇 상인과의 대화를 통해 시장 내부적으로도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 관람객의 입장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투어로 꼽고 있었다. 특히 외국인 관람객이나 아이를 동반한 가족 관람객일 경우에는 시장의 분위기에 자연스레 녹아있는 전시가 나름의 설득력을 높였다. 그러나 투어버스에서 내린 후 특정한 이정표가 없다는 것과 현지의 코디네이터가 없는 점들이 운영 상의 미숙함으로 지적될 만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는 국제비엔날레의 명목을 겨우 유지하는 수준을 보여준 것 같아 착잡했지만, ‘도약을 위한 과도기정도로 감안한다면 내년에는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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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시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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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신관 내부_sta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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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시관 외부_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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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시관 내부_설치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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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시관 내부_시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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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시관_꼴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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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버스 내부_한국적 풍경


2008/09/27 13:56 2008/09/27 13:56

Pi-Male-List

페미언니들이 들으면 기절하실 얘기지만, 많은 분야에서 초정상에 서 있는 이들 중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재계를 살펴보면 그러한 성적 편향은 극단적으로 나타나기까지 한다. ‘알파 걸이니 뭐니 지난 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긴 했었지만, 실세의 권력지도에는 별다른 미동이 (아직까지는) 없는 듯 하다. 문화계로 오면 그 상황은 조금 완화되긴 하지만, 얼마 전 방한한 스웨덴 여성 지도자가 말했듯 어느 정도의 평등은 이뤄졌을 지언정, 완전한 평등은 아직 멀었다는 게 적합한 표현일게다. 다소 미신스런 얘기지만, 신은 평균적인 재능은 다수의 여성에게 주시고, 평균 이상의 재능은 소수의 남성에게 주신 건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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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랑랑 (우) 윤디 리


 

중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랑랑과 러시아 출신의 소프라노 안나 넵트레코가 등장했을 2003-4년만 해도 이러한 기운들이 그 전 신동세대-, 키신이나 사라 장이 활동하던 890년대-와는 선을 긋는 일종의 클래식의 MTV’화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이후 윤디 리, 임동혁(& 임동민), 김선욱 등으로 이어지는 피아노 신예들의 등장은 여성 (신동) 클래식 주자의 행보에 비해 두드러지게 화려한 것이었다. 결국 실력과 외형을 겸비한 예비 스타들이 철저한 마케팅 전략에 의해 노출되는 것이 전혀 새롭지 않게 된 이상, ‘피아니스트 열풍을 넘어선 ‘Pi-Male-List’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지난 수년간 발행된 소비자 분석 서적 가운데 230대 여성의 돈지갑이 가장 큰 타겟이라고 밝힌 내용이 대부분을 이룬다. 그만큼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같은 나이대의 남성에 비해 자기만족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많다는 얘기다. 예를 들자면 최근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는 보이그룹(빅뱅, 샤이니, 2pm 등등)의 공략대상에 물론 틴에이저 층도 포함되겠지만, 그 이상으로 실질적인 이윤창구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일명 누님들’, 230대 여성층이다. 이런 현상을 곰곰이 살펴보면 시장이 ‘Pi-Male-List’의 등장을 반기지 않을 이유가 하등에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결혼보다는 일을, 사회적 시선보다는 개인적 취향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돈 좀 있는) 잠재적 여성 고객층이 형성됨을 예측하고 그 구미에 맞는 패키지를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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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임동혁 (우) 김선욱

 


(
다분히 사적인 호불호가 섞였으나) 그렇다면 그들의 매력은 무엇일까. 차갑게 말해 ‘Pi-Male-List’하나 하나가 완벽한 상품이라고 해도 소위 말하는 오로라, 혹은 자체발광이 없다면 그들은 허울 좋은 벽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시 요즘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는 냉혹하다. ‘물건이다 싶지 않은 물건은 아예 내놓지도 않는다. (결국 이제부터 나열할 들은 다 멋지다는 뜻.) 일단 중국의 혜성부터 시작해보자. 화려한 퍼포먼스로 눈길을 사로잡았던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전혀 스케일에 눌리는 기색 없이 멋진 연주를 선보인 랑랑. 데뷔할 때부터 열광했던 유럽에서 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첫인상이란 천하를 호령하는 중국의 황제와도 같았다. 대륙적인 기질을 넘치게타고난 랑랑은 소품보다는 대곡에 강하다는 장점이 있고, 작은 독주회보다는 큰 행사에 자신의 200%를 보여주는 예다. 무대매너도 탁월하고, (다분히 미쿡적인) 쇼맨십도 있어 ‘쎄서미스트리트에 출연해 큰 호응을 얻었을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거물 피아니스트로 거듭났다. 그에 비해 쇼팽 전문가답게 유약한 이미지의 테리우스 윤디 리는 얌전하면서도 선이 살아있는 연주를 선보인다. 유약하다고는 하지만, 강단은 살아있는 걸 보면 역시나 지킬 건 지킨다는 인상을 준다. 두 번의 서울 공연을 지켜보면서 랑랑 만큼 드라마틱한 연출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비교대상만 없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전문 레파투아를 만들어가는 연주가가 되지 않을까 한다. 임동혁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한국의 소녀팬들을 클래식 공연장으로 끌어들인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김정원은 논외로 하겠다.) 국제 콩쿨을 휩쓸며 (역시나) ‘리틀 쇼팽으로 명성을 날렸던 임동혁의 매력은 수줍어하는 외모와는 달리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연주를 보여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다양한 협연을 통해서 다소 단독적이었다는 기존의 틀을 깨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임동혁에 비해 조금 더 애늙은이같고 조금 더 깡다구가 있는 피아니스트가 바로 김선욱이다. 상당한 애연가라는 주변의 증언만큼이나 인생의 깊이를 일찍이 깨친 케이스랄까. (허어 -_-) 명망 있는 대기업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앞의 다른 피아니스트들과는 달리 순수국내피교육자라는 사실이 클래식계에서는 기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물론 손열음도, 고봉인도 있다!!!) 게다가 연주 내내 구도자와 같은 심각한 표정과 진지한 해석은 자칫 그의 나이를 의심하게끔 한다. , 그런 조숙함이 그를 오늘의 경지에 이르게끔 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매력 만점인 ‘Pi-Male-List’라면 자본의 계략인줄 뻔히 알고도 넙죽넙죽 상납하지 않겠는가. 때때로 그들의 음악이 아닌 다른 요소에 빠진 자신을 발견할 때쯤이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고상한 취미의 21세기적 진화니깐 눈 딱 감고 속아주련다.  



 베를린 필과 랑랑 협연,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콘체르토 작품번호 1, 1악장
(그의 데뷔시절이니 조금 더 풋풋한 맛이 있습니다요;)  

2008/08/29 23:25 2008/08/29 23:25

리듬 타는 책임감

중세가 금기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발설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도 일정한 발설의 선을 넘어서는 잉여의 시대, 과잉의 시대로 보여진다. ‘너무 똑똑하신 나머지 가만히 입 다물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는 양반들이 사대문 안 이서방 마냥 쫙 깔렸으니, 좀 못 배웠다,싶으면 가만있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그렇게 말이 자유로운 세상에 말이 말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냥 말이 음성적으로 인식되는 소리 이외에는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하는 듯하다. 콕 집어 말하자면, 말에 힘이 말에 영향력이 하나도 없다.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단어가 있으니 그는 바로 책임감이 아닐까 한다. 개인의 책임감, 성인의 책임감, 사회의 책임감도 모자라 기업에도 책임감이 생겨났고(적어도 그렇다고 하고) 심지어는 책임을 운운하는 펀드상품까지 등장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본의 어휘응용력인가!) 결국 책임감이라는 개념의 이와 같은 물()화는 그가 가지는 원래의 무형적 가치를 약화시킨다. ‘책임에 대해 떠들어대는 입은 많아졌어도 그를 실천하는 몸뚱아리는 눈 씻고 찾아봐도 흔적을 볼 수 없다. 그야말로 무책임한 사회가 고장 난 레코더마냥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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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최고 스타는 다름 아닌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SBYO)였다. 젊은 지휘자로 주목 받고 있는 구스타보 두다멜(27)이 지휘봉을 잡은 그 날, 평균 연령 20세를 밑도는 젊은 단원들은 바흐와 말러, 그리고 번스타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이어지는 레파토리로 관중석을 열광케 했다. 더 믿기 힘든 사실은 이들 모두, 그리고 두다멜 조차도 한 때 거리의 아이들이었다는 점이다. 법학자이자 음악가였던 호세 안토니오 아부레우 박사는 30여 년 전, 베네수엘라의 아이들이 거리로 내몰리면서 온갖 범죄에 휩싸이는 세태를 두고 볼 수 없어 ‘El sistema’라는 커뮤니티를 통해 길거리 아이들의 손에 악기를 쥐어주기 시작했다. (관련기사 링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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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시도는 수년 전 겨울 베를린에서도 있었다. 당시 베를린에서 거주하던 25개국에서 온 250여명의 아이들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클래식음악을 들은 적도, 춤을 춰 본적도 없다.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떠돌기만 했던 수많은 이민자 아이들을 데리고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은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한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맞춰 무용공연을 펼친다는 것. 물론 주인공은 250여명의 아이들이었다. 영국 출신의 유명한 안무가 로이스톤 말둠이 수개월간 노력한 결과, 처음엔 시큰둥하기만 했던 아이들의 마음이 가까스로 열리기 시작했고, 결국 너무나도 멋진 무대를 선사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리듬 이즈 잇!>은 각종 영화제를 휩쓸며 2004-5년 시즌 다큐멘터리 계를 뜨겁게 달궜다.

 

얼마 전, 뉴저지에 오래 머물다 귀국한 지인으로부터 흥미로운 말을 들었다. 거기 갔더니 우리네 사는 풍경과 확연히 차이 나는 단 한가지가 있더라고 말이다. 우리가 얼마나 악에 받쳐 살았는지가 느껴지더라며 적당한 자기만족에 안주하며 사는 그네들의 모습이 부러웠다고 했다. 비슷한 말은 김지운 감독의 <숏 컷>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유럽배낭여행을 떠났을 때,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젊은이들 눈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이 사슴 같은 눈망울을 지니고 살 수 있냐는 감탄이었다. 논리의 비약이 있지만, 책임의식 또는 책임감이라는 것은 나를 잠시 버리고 나 아닌 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 몸뚱아리 하나, 나 하나만 챙긴다고 해서 생기는 것은 최소한의 책임감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나아가 나 아닌 다른 사람,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발전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책임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앞서 생뚱맞게도 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결국에 우리가 이러한 책임감에 점점 무뎌지는 것은 그에 대한 구호나 강조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대신 그를 체감하는 각자의 정도가 그에 반응할 수 있을 만한 심리적 여유가 없기에 전체적으로 책임이 약화된(결여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물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손길과 특히 사회 언저리를 서성이는 아이들에 대한 자각이 존재한다. 그저 이를 좀 더 강압적이 아닌 자연스러운 테두리 안에서 함께 놀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하나 둘씩 모여들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책임에 대한 공허한 외침의 무한트랙에서 한 발자국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


                         Trailer of <Rhythm Is It!>



                         SBYO at BBC Proms 2007

2008/08/28 22:54 2008/08/28 2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