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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해당하는 글들

  1. 2009/03/09  New York to Caribbean (2)
  2. 2009/01/01  New Year's Greeting
  3. 2008/10/08  모던 보이(재)(재) + 아내가 결혼했다
  4. 2008/06/08  스탠바이 (2)

New York to Caribb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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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의 (죽어버린) 창작욕을 불태운 두 작품이 있었으니, 하나는 가수 타블로의 <당신의 조각들>이요, 다른 하나는 10년 만에 평단의 환호를 받으며 신작을 발표한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다. 하나는 뉴욕의 여러 골목에서 다른 하나는 카르브해의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인생군상들의 에피소드를 눈물 날 정도로 깔깔거릴 수 있게, 또 처절하게 절망할 수 있게 엮었다. 둘 다 주변인들의 삶을 종이에 (픽션화하여) 옮기는 과정 가운데, 국적과 인종, 정체성의 문제들이 면면에 녹아있음을 발견한다. 인물 개개의 삶은 어둡기 짝이 없지만, 책장을 덮고 마음이 묵직하지 만은 않은 것은, 그들이 다름에의 미학에 대해 꼼꼼하고도 리얼하게 그려냈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그런 배경에 있음직한 이야기만을 털어놓는 소설에 진절머리가 났다면, 당신에게 과감히 두 책을 추천한다. 특히, ‘읽히는 맛을 잊어버린 그대라면.

2009/03/09 12:02 2009/03/09 12:02

New Year's Greeting

새해가 밝았습니다,란 평이한 표현이 무색해지리만큼 2009년 첫 날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31일에서 1일로 하루가 바뀌었다고 해서 무언가 많이 달라진 것은 없지만,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도 오랜 시간을 시간과 시간 사이의 방점으로 구별해 왔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 말을 반복해 온지도 서른 해가 되어갑니다. , 더 정확히 말해 옹알이를 하던 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내뱉었던 때는 빼고 계산하자면 아직 서른 해는 안 되었겠지만요. 코팅지 모서리가 살짝 벗겨진 주민등록증은 야속하게도 물리적 나이를 줄일 수 없게 해 놓았습니다. 마음만은 스물이란 말도 왠지 낯간지럽네요. 스스로는 별반 달라질 바 없지만, 주변이 늘 문제입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정신 바짝 차려라 금방 사십이다 등등 당사자는 눈길 주지 않는 부분에 외려 난리들입니다. 저들도 늙어갈 텐데 말이죠.

딱 일년 전쯤, 김영하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재미있게 지내라구요. 당신도 재미있는 일을 찾았으니. 많은 이들에게는 재미라는 말이 사치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따금 "지금 행복해?”하며 문자를 보내는 친구의 존재가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만큼이나요. 굳이 맛이 이렇다, 모양이 저렇다 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듯, 모든 감흥도 마음으로만 새기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했습니다. 외양으로 비치는 것이야 어떻든 결국은 속사정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겉으로 행복하고, 부자이고, 잘난 것은 그저 타인의 눈에 반사되는 것일 뿐이지, 안으로 문드러지고, 가난하고, 병든 것은 쉽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를 품고 가는 이에게는 떼어버릴 수 없는 무언가 이겠지요. 지난 한 해는 무엇보다 그 속사정의 문제가 개인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함을 느꼈기에 서른을 책임질 때, 그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부족해 보이더라도 스스로 즐겁고 스스로 재미있으면 되는 거라고 되내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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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들른 서점가에서 오랜만에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데이터를 매일같이 재부팅하는 곳에서 문학 서적 한 권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누군가는 순수과학이 또는 철학이 문명의 발전을 좌우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문학이고 음악이 아닌가 합니다. 모든 것이 언어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언어마저도 멈추는 곳에서 음악이 탄생한 것이니깐요. 뒤늦게 소설 읽는 재미를 붙인 제 눈에 들어온 것은 2009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이었습니다. 이제는 중동출신 작가의 소설까지도 안방에서 낄낄거리며 읽을 수 있지만, 그래도 아련한 향수처럼 다시 찾게 되는 게 우리의 소설이 아닌가 합니다. 수상작을 제쳐놓고, 먼저 펴 보았던 이기호의 <김 박사는 누구인가?>와 성석제의 <해설자들>을 읽었습니다. 역시나 이기호였고, 오랜만의 성석제였습니다. 수상 후보작이었던 박민규의 <근처>도 내친김에 읽어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미안하게도) 세 번째로 읽은 대상수상작 하성란의 <알파의 시간>에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들어 실어봅니다. 새해니깐 소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삶이 팍팍할수록, 문자 자체가 서걱거릴수록 더 읽기를 바랍니다. 육체의 가난보다 정신의 가난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삶이 힘들수록 주문처럼 외우는 기축년이 되시길.

나는 풍경을 응시했다. 이제 간판의 계집아이가 나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이 세잔을 보듯 나의 간판이 나를 보고 있었다. 허만하 시인은 한 산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잔이 그 풍경을 받아들일 눈을 가지는 데에는 그때까지의 유럽 미술사의 모든 시간 플러스 알파가 필요했다고. 그 알파란 세잔이 시대보다도 앞질러 달렸던 바로 그만큼의 시간이 아니겠느냐고.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간판을 볼 수 있기까지 나에게도 나만의 알파의 시간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돌고 돌아 그 간판 앞에 서기까지 그 알파의 시간이 좀 길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응시했다.”


2009/01/01 17:04 2009/01/01 17:04

모던 보이(재)(재) + 아내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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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 좋은 소리만 잔뜩하고 떠나 보내려니 내내 슬픈 마음이 들어, 그래도 이것만은 칭찬해 주고 가자 싶었다. 이 영화에서는 빛나는 조연이 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주조연급) 시스케역의 김남길이요, 다른 하나가 오가이 역의 김영재이다. <후회하지 않아>로 잘 알려진 김남길은 경력에 비해 주눅들지 않는 연기를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논외의 이야기지만) ‘올빽이 잘 어울렸다. 죽마고우인 이해명(박해일 분)이 사랑 때문에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옆에서 목도해야만 해던, 불운했던 시절의 고위 일본인 간부 시스케. 그의 복잡다다한 내면을 보여주기에 호흡은 너무 짧게 끊어졌지만, 그래도 그의 번뜩이는 매력을 발산하기에 부족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비중이 작았던 오가이 역(조난실의 사촌오빠)의 김영재는 정지우 감독의 전작 <사랑니>에서도 나름의 색깔을 발하며 감독의 신뢰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도 이상적인 남자친구역을 소화하며 많은 여성 팬을 확보하기도 한 김영재의 가능성을 조연으로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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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자출신 친구로부터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그 친구는 일전에 영화 <모던 보이> 원작이었던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읽고, 영화를 접했다고 한다. 그런 까닭 때문이었는지, 나와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영화를 즐겼다고 한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정지우 감독이 아마도 책을 읽고 그 중에서 자신에게 와 닿았던 장면들을 추려, 영상화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 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들이 기대 이상으로 재현되어 꽤 만족스럽게 영화를 감상했다고도 덧붙였다. 더불어 일전에 원작소설의 비평과 관련해 작은 소동이 있었던 것도 귀뜸해 주었다. 2002년도에 발간된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에서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와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가 언급되는 과정에서 오해가 빚어졌었다. (관련기사 링크) 둘 다 문학동네상세계문학상이라는 한국문학계의 큰 상을 거머쥔 작품들이니 만큼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동시에 있는 것 같다. 오는 23 <아내가 결혼했다>가 개봉되면, 한국문학계의 젊은 기대주들의 수상작들이 모두 영화되어 원작과 영화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관련기사 링크)

2008/10/08 09:57 2008/10/08 09:57

스탠바이

스탠바이



총 칠백 정도 예상하시면 될 것 같네요.”

? 치치치치치치치일백이요?”

 

 남자의 안구가 눈꺼풀을 휘 집고 나오는 듯했다. 뱅그르르 도는 도수 높은 무테 안경을 쓴 창백한 얼굴의 여의사는 뭘 그렇게 놀랐냐는 듯이 그를 다시 쳐다본다. 남자는 귀를 의심한 듯 다시 물었다.

 

아니, 요즘 가격 많이 다운됐다는데 이거 좀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저희는 원래 코스트보다 퀄리티 위주로 가기 때문에 다른 곳과 비교하시면 좀 곤란해요.”

아무리 그래도선생님. 물론 제가 선생님이 이쪽 업계에선 최고라는 거 잘 알고 있지만그래도 제가 생판 남도 아니고. 어유. 제가 이래봬도 명환이 그 자식이랑, 아니지.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박명환 선생이랑 불알친구에요, 불알친구.”

환자분. 공과 사는 좀 구별해 주셔야죠. 제가 저희 허즈번드, 그러니깐 우리 닥터 박 친구들, 특히 베스트 프렌즈들 많이 만나봤지만 지금 환자분은 이제껏 뵌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요. 근데 다짜고짜 오셔서 부부부불아...어머, 입에 담기도 낯뜨거워서. 아무튼 그런 얘기 들은 적 없으니깐 자꾸 우리 닥터 박과 연관시키지 말아주세요. 아시겠어요?”

 

남자는 친구 와이프고 뭐고, 자신 앞에서 눈을 흘기고 있는 여의사와 한바탕 하려던 마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진료실 문을 여닫는 그의 손이 짧게 파르르 떨렸다.

쓰읍.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에이씨. 이게 뭐냐, 쪽 팔리게.’

왜소한 체구의 남자는 결국 아시겠어요?’라고 하이톤으로 대꾸하던 여의사를 뒤로한 채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따라 그의 눈에 강남역 6번 출구의 아치모양이 서글프게 보였다. 초록빛의 문양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어느새 초록 물결로 넘실거렸다. 누가 볼까 싶어 남자는 재빠르게 옷소매로 눈가를 닦아냈다.

씨발, 사내새끼가 짜고 지랄이야.; 남자의 뺨이 잠시 반짝거렸다.

 

**

성명 나현석. 나이 만 서른. 미혼. 현역예비역. 직장경력 지역 케이블방송 사내 안내방송 담당 아나운서 2. 마포구 공동체 라디오 마포 FM’ 새벽 2-4 타임 디제이 활동 1. 지방 국립대 노어과 출신. 신체조건 예쁘장한 얼굴에 왜소한 체격. 안짱다리. 2대독자 외아들. 여친 없음. 특이체질 커피 향을 맡으면 붉은 반점이 생긴다. 버릇 1. 밥과 반찬이 입 안에서 섞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꼭 밥을 먹고 물로 입을 헹군 후 반찬을 먹는다. 버릇 2. 당황하거나 할 말을 잃거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의성어를 내뱉고 싶으면 일괄적으로 어이쿠야라고 말한다. 별 뜻은 없다.

 

**

덜컹거리는 2호선 순환선 4706번 열차에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교대, 사당, 낙성대, 서울대 입구 할 것 없이 금요일 저녁은 술요일 저녁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들, 초점 없는 눈빛들, 그리고 마늘냄새, 숯냄새, 사람냄새. 그러나 그 열차 칸 안에 한 사람만은 멀쩡했다. 멀쩡한 게 어지러울 만큼 정신이 멀쩡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멀건 국 한 사발을 내려놓은 엄마의 뿌루퉁한 표정은 현석을 늘 불편하게 했다. 말 없이 국에 숟가락을 집어넣는 현석을 엄마는 답답하다는 듯 잠시 흘겨보았다.

이제 지겹지도 않니? 내가 다 지겹다, . 언론고신지 뭔지.”

난 아직 스탠바이인 것 뿐이라니깐.”

큐 싸인 들어올 거였으면 애저녁에 들어왔겠다. 큐큐큐! 하고.”

엄마와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넌 할 수 있어라던가 역시 내 아들이 최고야따위는 엄마에게 어울리는 어휘가 아니었다. 스탠바이. 그렇게 따지고 보면 아들 대학 집어넣고 힘들게 살았으니 좀 놀아야겠다며 뜬금없는 황혼이혼을 한 엄마의 인생도 스탠바이가 아닌가. 뭘 원하고 뭘 하고자 하는 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일을 저지르고 보는 엄마도 그렇게 한심하게 여기는 아들의 인생과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은가. 누군들 스탠바이네요하면서 마냥 언제 올지도 모를 인생의 열차를 기다리고 싶겠나. 하다하다 지치면 진짜 이게 내 길인지 싶어 애초의 목표마저도 흔들리겠지만, 이왕에 거기까지 간 거 조금만 더 버티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으니. 최소한 그때까지의 시간과 정성을 봐서라도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와서 다른 곳에 기웃거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고. 마흔의 눈으로 보면 서른도 한창 때이겠지만, 알 수 없는 무기력함에 매일의 호흡이 턱턱 막히는 것은 또 어찌할 것인가. 젠장. 스탠바이. 나도 지겹다, 지겨워. 누군 좋아서 이러고 있나. 할 수 없어서 이러고 있지. 대안이 없는 변화는 무의미하다. 할 수 있었다면 마냥 이러고 있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

헉헉거리는 숨을 참으며 겨우 도착한 곳에는 호루라기를 불고 있는 남색 유니폼의 경비원만이 서 있었다. 에무는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신입사원 실기시험장과 관련된 안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경비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기 혹시 아나운서 시험장이 어딘 줄 아세요? 여기 근처라고 하던데…”

공채 말씀하슈? 이봐요, 여긴 별관이에요, 별관. 공채는 본관에서 하는 거에요. 잘못 찾아 왔구만.” 젊은 사람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만 같아 애무는 재빨리 고맙다는 말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 병신. 그러길래 아까 택시 기사한테 제대로 물어보고 말할 껄. 괜히 본관이라고 우기는 기사 꼴이 보기 싫어 별관으로 왔건만, 에무는 자신의 소심함을 탓하기 시작했다.

9 15분 전. 가까스로 방송국 본관의 철제 문을 통과한 에무는 건물 입구 벽면에 붙은 대기자 명단을 확인했다. 수험번호 38098-251 나에무 스튜디오 A-7 오전 9시 뉴스리딩. 에무는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하고 속으로 스튜디오 A-7’을 되 내이며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그날따라 방송국 네모난 바닥재가 유난히 우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장마철도 아닌데 이상하네라고 생각할 즈음, 그는 어느새 스튜디오 A-7앞에 당도했다.

 스튜디오 A-7이 있는 복도에는 스튜디오 A-1에서부터 A-10까지 총 10개의 스튜디오가 굳건한 방음 문의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잡음으로부터 자유롭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듯했다. 열 개의 스튜디오 앞에는 서 너 명의 대기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대본을 외우고 있었다. 순간 스튜디오 A-5에서 진행요원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정재형! 수험번호 38098-176 정재형!”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리부리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한 대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수험번호 38098-176 정재형입니다!”

군대 훈련장에서 갓 튀어 나온듯한 그 남자의 목소리에 다른 대기자들이 피식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령하는 것처럼 하실 필요는 없구요. 사운드는 저희가 알아서 조절하겠지만, 시험장에 있는 건 초감도 마이크라 평소에 말씀하시듯 하시면 되요. 아시겠죠?”

!”

여지없이 40데시벨에 육박하는 성량으로 답하는 그 대기자를 흘끔거리며 에무는 시간에 쫓긴 자신에게 안정의 최면을 걸었다. ‘괜찮아, 나현석. 넌 할 수 있어. 한 두 번도 아닌데.’

 

**

초감도 마이크는 현석의 생각보다 작았다. 진행요원이 다가와 잠시만 실례할게요하더니 셔츠 안으로 핀 마이크를 빼내어 넥타이 윗부분 옆에 살짝 달아주었다.

, 준비되셨으면 큐 싸인 갈 겁니다. 두 번째 스트레이트 기사부터 갈게요.”

짙은 네이비 컬러의 수트를 차려 입고 스튜디오 안 뉴스 진행자 자리에 앉은 에무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한 손으로 애써 진정시켰다. 옷 매무새를 짧게 다듬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한 번 쓸어 내린 그는 헛기침을 살짝 내뱉었다. 시이자악. 현석이 고개를 끄덕여 카메라맨에게 싸인을 주자 맞은편 정면에 붉은 색 불이 들어왔다. ON AIR.

오늘 새벽 3 10분경, 서울시 강동구 천호동 한 빌라에서 끔찍한 강도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경찰에 의하면 당시 빌라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이모씨와 일가족 3명이……”

. 됐습니다. 다음 8번 기사 가죠.”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씨가 탑승한 우주선이 성공적으로 발사된 이후 처음으로 우주에서 보내온 발신메시지 입니다. 이호영 기자가 전합니다.”

. 수고 하셨구요. 현석 씨는 스포츠에 관심 있나요?”

? 아직 부족한 편이지만 더 관심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우리 채널 메인스포츠 뉴스는 여성캐스터가 진행하는 데 어떻게 봤어요?”

. 매끄럽게 진행 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나현석씨는 더 잘할 수 있겠어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럼 한 번 야구 생중계 5분만 해볼래요?”

?”

아니 편하게. 지금 눈 앞에서 롯데와 두산이 경기한다 치고. 자유롭게 한 번 해봐요.”

 

**

? 야아. 그런 건 내가 전문인데, . 날 부르지 그랬어, 임마.”

지글거리는 불 판 사이로 돼지껍데기를 우적거리며 성한이 말했다.

어이쿠야. 그럴 새가 어딨어. 머리 속이 다 하얗더라.”

그래서 어쨌어? 지어서라도 해야 할 꺼 아냐.”

했지. 하긴. 근데 무슨 말을 한 건지 아직도 기억이 안 나.”

그러길래 평소에 애들이랑 야구장 가자고 할 때 같이 좀 가지.”

그러게.”

솔직히 야구야 어떻게 되든 관심 없었다. 공중파 아나운서 되려고 벅적거리는 야구장을 전전한다는 것도 우스웠다. 되고 싶은 게 있다면,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면 저승사자 밑이라도 기꺼이 닦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성한의 말이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저승사자 좋아하네. 동물원에 호랑이도 덮치면 무서워서 덜덜 거릴 자식이. 넌 군대나 갔다 와라. 서른 되어서까지 요리조리 뺀질 거리지 말고. 저 새끼도 그러고 보니 스탠바이구만. 군대 가기 일보직전.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인간이 어디 있을까 만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관여하는 행위 자체가 경멸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그 또한 스스로 속이 배배 꼬여 남이 옳은 얘길 하면 못 참아 하는 성격이라고 핀잔 받기 일쑤지만. 그렇다고 남이 던지는 얘기, 실제론 그다지 관심도 애정도 없으면서 무심코 흘리는 얘기에 인생이 엎치락 뒤치락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나조차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때가 이리도 많건만, 너인들 알리요. 각자 인생 나름대로의 하자는 알아서 처리하자는 식. 그게 현석이 생각하는 삶의 본질이었다.

**

지어서 하는 얘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평소 즐겨보지도 않던 야구중계를 하자니 그깟 5분이 더 이상 그깟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현석이 자신의 정면에 보이는 디지털 시계를 흘끔거리며 이사만루의 상황에 대해 어줍잖은 이야기를 내뱉고 있는 동안 면접관의 표정은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지던 순간 면접관 한 명이 그만, 수고하셨어요!’했다. 매번 느끼는 부분이었지만 면접장에서의 수고하셨습니다만큼 차갑게 들리는 수고도 없지 싶었다. 왠지 뭔가 잘못해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현석씨는 나이가 조금 있네요.”

. 이것저것 경험을 많이 쌓느라…”

우리 회사에는 총 몇 번째 시험 보는 거에요? 작년에도 본 걸로 기록되어 있는데…”

방송사의 기록 시스템은 의외로 치밀했다. 언론고시 스터디를 같이 하던 멤버의 얘기에 따르면 지난 번에 PD로 지원했다 올해 방송기자로 지원하는 바람에 그 이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했다. 솔직히 언론사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원분야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그 에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 들어가기만 하면 신문기자든 방송기자든 언론이라는 명실상부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손에 마이크를 잡건 타다닥 거리며 노트북을 쳐대건 방법은 별반 의미가 없다. 내가 말하고 내가 쓰는 것이 대중의 눈과 귀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짜릿하게 느껴질 뿐인 것이다.

마포 공동체 라디오라….거기는 뭐하는 데에요?”

. 말 그대로 소출력 라디오로써 마포 주민을 위한 방송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잠자코 있던 오른쪽의 여자 면접관이 물었다.

청취자는 몇 명이나 되요?”

현석은 순간 멈칫거렸다.

 

**

, 뭐라고 했어? 한 십만 명은 된다고 하지.”

성한은 태연한 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마포 인구가 사십 만 명인데. 그럼 그 중 사분의 일이 우리 방송을 들었다고 해? 걔네들이 바보냐, 그걸 모르게?”

그래도 임마. 일단 좀 뻥도 섞어 가면서 얘길 해야 심사하는 사람들도 귀가 쫑긋 설 거 아냐. 너도 네 입으로 그랬잖아. 언론사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애들이 매해 수 만 명씩 쏟아지는 판에 경쟁력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안 그래?”

성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파이 자체가 작은 상황에서 지원자는 매해 늘어나니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방송 한 번에 서른 명이 될까 말까 한 청취자를 십만 명으로 둔갑시키고 싶진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공중파에 들어가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벌이는 시원찮았지만 마포 라디오에 있을 때가 훨씬 속이 편했다. 처음엔 몇 명 안 되는 청취율에 신경이 쓰이긴 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수가 중요한 게 아니란 결론에 다다랐다. 애청자들이 올려주는 게시판 후기와 신청곡, 사연 등을 꼼꼼히 읽다 보면 공중파 라디오 부럽지 않은 보람도 느꼈다. 발렌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 때 자그마한 선물을 보내오는 청취자도 있었다. 소소한 낙이 모여 도란도란한 한 때였다. 라디오 방송이다 보니 외형적인 것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어 편한 부분도 있었다. 다른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성형이다 뭐다 할 때 현석은 캐주얼한 복장으로 목 관리에나 치중하는 정도였다. 라디오 방송이라는 게 스트레스가 극심하진 않았지만 매일 조금씩 하는 모양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축적되는 피로가 있긴 했다. 그런 부분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장이었는데역시나 그 놈의 돈이 문제였다.

 

**

현석은 끝내 야구중계가 마음에 걸렸다.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줄곧 굳어있는 것도 그것 때문인 것만 같았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현석의 입사지원서를 넘기는 소리만이 파스락 거렸다. 날렵한 티타늄 안경테를 쓰고 있던 한 남자 면접관이 물었다.

혹시 성형한 곳이 있나요?”

아니요.”

재빠른 현석의 대답에 면접관은 잠시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이어 물었다.

그럼 성형을 하실 의향은 있는 건가요?”

“….글쎄요. 해야 할 곳이 있다면야….”

말끝을 흐리는 현석에게 그 면접관은 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나 요즘은 아나운서도 연예인 못지 않은 미모를 가져야 한다는 게 정설인가 보다. 몸에 칼 대는 것도 께름칠 하고 고칠 돈도 없지만, 외모 때문에 미역국을 먹는 거라면 투자라도 해야지 하는 오기가 생겼다. 그러고 보니 초등하교 동창 놈 와이프가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던 것 같다. 강남역 근처라고 했던가. 수소문해서 거기라도 찾아가봐야겠다. 그나저나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지. 오늘 면접이라고 얘기도 못 했는데. 만년 백수 노릇 하는 게 탐탁지 만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왕에 아들한테 크게 인심 한 번 썼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될지 모를 심산이다.

나현석씨는 왜 아나운서가 되려고 하죠?”

. 저는 국민의 귀와 입이 되고자 합니다. 바른 언어를 사용하고 또한 신속한 정보를…”

아아, 잠깐만!”

현석이 답을 이어나가는 데 면접관 중 하나가 말을 툭 끊었다.

그렇게 판에 박힌 대답 말구요. 진짜 속마음을 한 번 얘기 해봐요. 왜 방송국에 들어오고 싶은 거죠?”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심사가 아무리 지겨워도 그렇지, 세태가 아무리 솔직하고 파격적인 걸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하는 심사가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왜 하필 내가 걸린 걸까. 다짜고짜 진짜 속마음을 한 번 얘기해 보라니. 무슨 얘기를 듣고 싶다는 건지 현석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임기응변에 강한 성한이라면 이때 어떻게 답했을까. 아니 올해 합격자가 될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했을까.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왜 하필 나람.

나현석?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한 번 말해봐요. 우리도 그냥 궁금해서 하는 말이니깐.”

면접관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현석은 죽을 맛이었다. 그 어떤 면접 족보에도 이런 유형은 본 기억이 없었다. 솔직한 대답? 그런 게 왜 궁금하지? 솔직한 대답? 그런 건 나도 없는데. 심사위원의 눈빛과 정면에 보이는 시계가 현석의 대답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현석은 아차 싶었지만, 이왕 뱉은 말을 주어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 모르겠다구요?”

심사위원들은 일제히 황당하다는 듯이 현석을 바라보았다.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이쿠야.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 와 있네요. 허허.”

면접관석이 잠시 술렁였지만 이내 익숙한 말투로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고 현석을 내보냈다. 면접장 스튜디오 문 위에 켜있던 ‘ON AIR’ 불도 풀썩 꺼졌다.

 

**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세대에 자비란 없는 법이다. ‘우리 땐 그러지 않았었는데하며 젊은 세태를 한탄하는 모양새야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매번 규격에 맞는 대답을 요구하는 것도 상 고문에 속하지 싶다. 무기력함에 대고 호통을 치면 돌아오는 건 메아리 없는 한숨뿐이다. 나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좀 알고 싶어요-하는 게 호환마마와 같은 병은 아니지 않은가. 그저 자연스러운 시대의 단상이랄까. 뭐라고 불러도 좋으니 그냥 내버려두어도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현석은 자신이 영원히 스탠바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큐 싸인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런 건 처음부터 없는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게 또 뭐 어떠냐고, 원래 인생도 물 흐르듯, 미래도 물 흐르듯 이뤄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없이 얼굴을 붉히는 세상에 대고 스탠바이이라고 외치는 게 낫겠다 싶었다. , 스탠바아아이-                  

WRITTEN BY B.KANG / JUNE 2008

2008/06/08 22:45 2008/06/08 2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