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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에 해당하는 글들

  1. 2009/06/21  꾼의 변
  2. 2009/06/19  정치적 암컷
  3. 2009/04/22  강보라의 프랙탈(2) (3)
  4. 2009/03/01  The Art of Visual Storytelling
  5. 2008/08/15  진실 요리법 (上)
  6. 2008/06/08  스탠바이 (2)

꾼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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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매한 국어사전에 의하면 이란 어떤 일, 특히 즐기는 방면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하긴 대부분 이란 접미사를 붙이는 것들을 보면 사기꾼, 술꾼, 도박꾼처럼 좋지 않은 경우가 많긴 하다. 하지만 반대로 나무꾼, 춤 꾼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긴 하다. 나의 경우에 이란 선수와 동의어다. 있어 보이게 말하자면, ‘프로또는 전문가와 동의어란 거다. 내게 있어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보다는 당신은 어떤 꾼입니까라는 질문이 훨씬 도전적이다. 전자는 추상적이고 미래지향적이지만, 후자는 구체적이고 현재집중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너는 어떤 꾼이냐고 물었을 때, 조심스레 말문을 트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야기꾼 입니다.”라고. 내게 있어 이야기는 단순히 픽션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요, 스토리의 한국어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넓고도 유연한 개념이다. ‘스토리텔링이란 단어가 판을 치는 형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게 대체 뭐냐고 했을 때 시원스레(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답을 해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장사치들만이 득실거렸다. 관광지를 조성하기 위해 만드는 설탕발림 정도로 이야기를 추락시킬 마음은 없다. 또 특정기업의 과오를 덮어주고, 이미지를 향상시켜주기 위한 딱갈이노릇도 하고 싶지 않다. 이야기꾼이란 자신이 보는 현실을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이다. 저널리스트요, 작가이자, 비평가 또 창작가인 것이다. 장르를 잡식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재생산해내는 이인 것이다.

나는 글쓰기 작업이 어디서 시작되건 결국은 순수한 나만의 시각으로 파헤쳐진 창작의 연장이라고 자부한다. 촘촘히 연계된 네트워크 안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방식, 무의미를 유의미로 탈바꿈시키는 방식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 영감과 감흥은 허공에 떠다니지 않는다. 자극은 외부에서 오기도하지만, 내부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내부에 집중한다. 그 목소리를 듣는다. 정제될 때까지, 나만의 언어, 나만의 이야기가 되는 지점까지. 그 다음에야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한다. 벅차 오르는 가슴을 안고.

꾼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열정을 요구한다. 동시에 인내와 재능도 겸비해야 한다. ‘은둔 작가로 잘 알려진 일본의 마루야마 겐지는 이렇게 말한다. “창작이란 고()의 자세로 정신의 깊은 곳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꾼은 먹고 사는 문제와 전면적으로 부딪혀야 한다. 다른 루트를 통해 안정적으로 삶이 보장되는 순간, 꾼은 사라진다. 가난과 시련,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이는 그 경험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들이 증발하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꾼이 아니다. 삶과 투쟁하되, 그 안에서 고귀함은 잃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시계에 세계의 시계를 맞추어야 한다. 톨스토이가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 답했다. “나는 언제나 생각합니다. 작가는 할 말이 있을 때 써야 한다. 머리가 성숙해졌을 때 그것을 종이에 옮겨야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내가 반드시 3월이나 10월에 잡지를 위해 글을 써야 하지요?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란 한 자를 짊어지려고 하니 어깨가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단순히 직업이 아닌, 소명을 찾아나선다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가볍다. 입과 손이 근질거리는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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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00:10 2009/06/21 00:10

정치적 암컷

조금 격한 표현이지만, 정치적 암컷은 (원래는) 섹시하다. 욕망과 야망은 수컷의 전유물인줄로만 알았겠지만, 실상 역사적 야화를 잘 살펴보면 칼을 휘두른 건 남자지만 그 칼자루를 쥐어준 건 여자였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미모로 때로는 두뇌로 공략하는 방법은 다양했지만, 그를 가르는 야성은 동색이었으리라.

아직도 안보리에는 우중충한 남성 수트들만이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만, 안방극장은 무서운 언니들에게 저당 잡힌 지 오래다. 그래. 재미없는 일들은 남자들에게 맡겨! 우리는 진짜를 휘어잡을 테니깐! (꺄르르르) , 순간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한참 동안 숨겨왔던 암컷의 속내를 드러낼 때가 왔나 보다. 정치여, 기다려라.

SBS 시티홀

대표 미중년으로 떠오른 차승원과 한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김선아가 만나 티격태격 러브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한 평범한 하급공무원이 소도시의 시장이 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다. 온갖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정치판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관철해나가는 우직한 여성 리더의 모습은 그다지 미약해 보이지 않는다. 늘 독립적인 성향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운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작가의 기우 때문인지) 막강한 남성조력자를 옆에 두기 마련이라, 때로 여주인공의 독립심이 빛을 발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번 드라마에서는 좌충우돌하던 여성 캐릭터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점점 강해져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남성조력자에게 큰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혹자는 강한 것은 옳은 것을 이긴다고 하였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는 법인가 보다. (보너스로 차승원의 매력을 훑어보는 만화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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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선덕여왕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시대의 주인이 된다는 슬로건을 걸고 50부작으로 방영될 예정인 MBC의 야심작. 아직까지는 아역에 비중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탄탄한 긴장관계를 이끌어가고 있음이 눈에 띤다. 최근 한 신문 칼럼에서는 선덕여왕과 미실의 리더십을 비교분석하기도 할 만큼(기사보기) 사극 속에 등장하는 여성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아직은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선덕여왕은 곧 인재를 중용하는 용인술을 발휘하는 등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남다른 친화력을 겸비한 리더로 부상할 예정이다. 특히 미실의 경우는 유명한 팜므파탈로 악인화되었지만, 그만의 정치력은 선과 악의 잣대를 벗어나 주목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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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C ≪Parks and Recreation

유명 쇼 프로그램인 ≪Saturday Night Live≫의 대표명사였던 Amy Poehler를 앞세워 ≪The Office≫의 제작진이 내놓은 야심작이다. 언뜻 보면 ≪The Office≫와 유사한 카메라 워킹이나 드라이한 유머로 단순히 스핀-오프 판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갈수록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잡아가고 있다. 기본적으로 정부부처의 행정과 관료주의를 냉소적인 시각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매 상황과 대사가 함축하고 있는 바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감상의 재미가 두 배로 늘 것이다. 동명의 정부부처의 Leslie Knope라는 혈기왕성한 여공무원을 둘러싼 가지각색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Leslie는 힐러리나 페일린과 같은 여장부가 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물론 모든 상황은 시청자의 웃음으로 회색 칠 되지만 말이다.

Showtime ≪Nurse Jackie  

≪Nurse Jackie≫≪House M.D≫≪Six feet under≫ 또는 ≪Californication≫와 같은 블랙유머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해 줄만한 작품이다. 간호사 수 십 년의 베테랑 간호사가 겪는 병원에서의 일상을 다룬 드라마이지만, 무미건조한 미국의 일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다큐멘터리기도 하다. 면도칼을 목에 댈 때마다 삶과 죽음이 가까이 맞닿아 있음을 느낀다던 누군가의 말처럼 그 사이의 간극을 급박하게 느끼는 곳이 바로 병원일 것이다. 미국인들이 지나치게 법정물과 병원드라마를 편애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인간의 삶이 천국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적나라한 시공간도 없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재키가 얼마나 더 ‘X같은순간들과 마주하게 될 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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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9 21:11 2009/06/19 21:11

강보라의 프랙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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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일정대로라면 더 일찍 업데이트가 되었어야 하는데, 전체적으로 조금씩 늦어지네요. 두 번째 연재 글을 올립니다. 공부도 하고, 생각도 여러 번 정리해서 쓰고 있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라 쉽지가 않네요. 아무튼, 건필 할 수 있도록 응원 부탁 드립니다. (칼럼 바로가기)  

2009/04/22 23:41 2009/04/22 23:41

The Art of Visual Storyte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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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동화작가인 David Wiesner의 특별전을 포함한 CJ 문화재단의 <2009 그림책 페스티벌>이 오늘 부로 막을 내렸다. 최근 들어 영화 외에도 연극음악미술계에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CJ 문화재단 주최의 이번 전시에는 마지막 날까지도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관람객들로 북적이었다.

특히 성곡미술관 별관에서 진행된 David Wiesner의 초정 전시는 그의 방대한 작업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많은 호응을 얻었다. Wiesner는 텍스트 없이 그림으로만 이야기하는 동화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을 좋아해, 그 그림들이 담고 있는 디테일한 묘사를 줄곧 따라 그렸다고 한다. 또한 백과사전 등에 수록된 이미지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이, 현재까지의 그의 풍부한 표현력에 일조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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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타의 전시를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David Wiesner영상시대에서도 정지된 이미지만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극대화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텍스트를 배제하고 오로지 그림으로만 독자에게 다가감으로써, 한층 풍부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았다. 온갖 동식물과 우주생물들이 한 데 어울려 다양한 표정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통해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새로운 스펙트럼을 제시하고 있는 그의 그림 앞에 잠시나마 서 있을 수 있었음은 분명 큰 행운이었다. 이야기는 흔한 방법으로, 그러나 힘 있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드물다. 페이지 간의 구획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세계를 전달한 Wiesner는 바로 그 ‘art’를 이야기하고 있다.

2009/03/01 23:04 2009/03/01 23:04

진실 요리법 (上)

 

진실을 절대적인 관점으로 보느냐, 혹은 상대적인 관점으로 보느냐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이를 주창한 이래, 계속되어온 지리멸렬한 논쟁 중 하나이다. 가치와 인식의 문제는 논쟁의 끝이 존재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는 물론 아니다. 그렇기에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각각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조금 더 상대주의에 힘을 더 실어주는 모양새가 된 듯하다. 적어도 미디어의 세계 안에서는 말이다. 과거 일부 정보를 다뤘던 이들의 전유물이었던 진실 요리법이 비단 한정된 소수로부터 대중의 선상으로까지 퍼졌으니 말이다. 예전 같았으면 장르에 속하지도 못했을 페이크 다큐와 같은 부분들이 버젓이 진실을 말하는 또 다른 소통양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변호사나 정치인(또는 크리스마스의 부모)만이 아니다. 아차차. 실수 인정.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선상에서의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진실 요리법은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America’s got talent 2008

 

올 여름 NBC의 대표 시리즈로 방영되고 있는 <America’s got talent>‘Talent-search show’분야에서 최고 히트작으로 손꼽히는 <American Idol>의 제작사인 FremantleMedia North America and Simon Cowell's SYCO Television에 의해 제작된 리얼리티 쇼다. 2006 6 21일 프리미어를 필두로 벌써 3번째 시즌을 맞이하고 있는 이 쇼는 제리 스프링어가 호스트를 맡고, 만년스타 데이빗 핫셀호프, <The Osbourne’s>로 인기를 얻었던 섀론 오스본, 그리고 영국출신의 음악 전문가 피어스 모건이 심사위원단을 구성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도 <American Idol>과 별반 차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 프로그램은 전작에 비해 더 넓은 계층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일말의 차이점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일례로 같은 컨셉의 영국 프로그램이 폴 포츠라는 걸출한 오페라 스타를 만들어낸 것만 봐도 아이돌중심의 스타탄생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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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셀리브리티를 이용한 <우리 결혼했어요>와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그에 대한 구성적 틀도 안정되어가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아직 ‘Talent-search show’ <Survivors> <Big Brother>와 같이 일정한 상금을 놓고 장기간 경쟁을 벌이는 ‘Game show’는 여러 번 파일럿 방송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물론 영미권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리얼리티 쇼가 대형 콘텐츠 바이블 기업(미디어 콘텐츠에서 말하는 바이블이란 프로그램 전반을 아우르는 정보를 하나의 바이블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을 뜻한다. 프로그램과 관련된 사항이 총망라되어 있는 이 바이블은 통째로 혹은 단계별로 판매가 가능하다. 영미권과 유럽권의 유명 게임 쇼는 대부분 바이블 형태로 제작된 후, 타 채널에 판권을 판매하고 있다-필자 주) 2-3년의 시간에 걸쳐 사전제작단계에서부터 파일럿 한 두 편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대한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기 때문에 철저한 사전검증이 끝난 상태에서 온에어가 되는 것이기에 우리의 실정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그런 프로그램 구성 상의 짜임새보다도 중요한 건 리얼리티를 만들어가는 참여자들의 감정표현과 그를 극대화하는 카메라가 아닐까 한다. 실제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소 오버스러운 연기들이 펼쳐지는 것이 미국 리얼리티의 특징 중에 하나인데, 바로 이 부분이 리얼리티 쇼를 한층 리얼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그러기에 한국과 일본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자막 문화없이도 충분히 표현 효과가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원체 미국 문화 자체가 감정 표현이 (우리의 것에 비해) 풍부하다는 점과 개인이 카메라를 덜 의식하는 부분이 묘하게 만나, 잘 짜여진 한 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철저한 사전조사를 통해 어떤 캐릭터들을 어떻게 한 무대에 올릴 것인가 하는 제작진의 치밀한 계산이 아니었더라면 극의 구성은 쉽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진실을 요리하는 법을 제대로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타인의 진실이 자신의 진실처럼 느껴지게 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고민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더 이상 사람들은 그 자체가 진실인지 아닌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게 내가 믿을 법한 진실인지 아닌지에 더 흥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cf. Queen Emily(40), Preliminary Contest in New York (below)

2008/08/15 11:23 2008/08/15 11:23

스탠바이

스탠바이



총 칠백 정도 예상하시면 될 것 같네요.”

? 치치치치치치치일백이요?”

 

 남자의 안구가 눈꺼풀을 휘 집고 나오는 듯했다. 뱅그르르 도는 도수 높은 무테 안경을 쓴 창백한 얼굴의 여의사는 뭘 그렇게 놀랐냐는 듯이 그를 다시 쳐다본다. 남자는 귀를 의심한 듯 다시 물었다.

 

아니, 요즘 가격 많이 다운됐다는데 이거 좀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저희는 원래 코스트보다 퀄리티 위주로 가기 때문에 다른 곳과 비교하시면 좀 곤란해요.”

아무리 그래도선생님. 물론 제가 선생님이 이쪽 업계에선 최고라는 거 잘 알고 있지만그래도 제가 생판 남도 아니고. 어유. 제가 이래봬도 명환이 그 자식이랑, 아니지.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박명환 선생이랑 불알친구에요, 불알친구.”

환자분. 공과 사는 좀 구별해 주셔야죠. 제가 저희 허즈번드, 그러니깐 우리 닥터 박 친구들, 특히 베스트 프렌즈들 많이 만나봤지만 지금 환자분은 이제껏 뵌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요. 근데 다짜고짜 오셔서 부부부불아...어머, 입에 담기도 낯뜨거워서. 아무튼 그런 얘기 들은 적 없으니깐 자꾸 우리 닥터 박과 연관시키지 말아주세요. 아시겠어요?”

 

남자는 친구 와이프고 뭐고, 자신 앞에서 눈을 흘기고 있는 여의사와 한바탕 하려던 마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진료실 문을 여닫는 그의 손이 짧게 파르르 떨렸다.

쓰읍.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에이씨. 이게 뭐냐, 쪽 팔리게.’

왜소한 체구의 남자는 결국 아시겠어요?’라고 하이톤으로 대꾸하던 여의사를 뒤로한 채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따라 그의 눈에 강남역 6번 출구의 아치모양이 서글프게 보였다. 초록빛의 문양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어느새 초록 물결로 넘실거렸다. 누가 볼까 싶어 남자는 재빠르게 옷소매로 눈가를 닦아냈다.

씨발, 사내새끼가 짜고 지랄이야.; 남자의 뺨이 잠시 반짝거렸다.

 

**

성명 나현석. 나이 만 서른. 미혼. 현역예비역. 직장경력 지역 케이블방송 사내 안내방송 담당 아나운서 2. 마포구 공동체 라디오 마포 FM’ 새벽 2-4 타임 디제이 활동 1. 지방 국립대 노어과 출신. 신체조건 예쁘장한 얼굴에 왜소한 체격. 안짱다리. 2대독자 외아들. 여친 없음. 특이체질 커피 향을 맡으면 붉은 반점이 생긴다. 버릇 1. 밥과 반찬이 입 안에서 섞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꼭 밥을 먹고 물로 입을 헹군 후 반찬을 먹는다. 버릇 2. 당황하거나 할 말을 잃거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의성어를 내뱉고 싶으면 일괄적으로 어이쿠야라고 말한다. 별 뜻은 없다.

 

**

덜컹거리는 2호선 순환선 4706번 열차에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교대, 사당, 낙성대, 서울대 입구 할 것 없이 금요일 저녁은 술요일 저녁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들, 초점 없는 눈빛들, 그리고 마늘냄새, 숯냄새, 사람냄새. 그러나 그 열차 칸 안에 한 사람만은 멀쩡했다. 멀쩡한 게 어지러울 만큼 정신이 멀쩡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멀건 국 한 사발을 내려놓은 엄마의 뿌루퉁한 표정은 현석을 늘 불편하게 했다. 말 없이 국에 숟가락을 집어넣는 현석을 엄마는 답답하다는 듯 잠시 흘겨보았다.

이제 지겹지도 않니? 내가 다 지겹다, . 언론고신지 뭔지.”

난 아직 스탠바이인 것 뿐이라니깐.”

큐 싸인 들어올 거였으면 애저녁에 들어왔겠다. 큐큐큐! 하고.”

엄마와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넌 할 수 있어라던가 역시 내 아들이 최고야따위는 엄마에게 어울리는 어휘가 아니었다. 스탠바이. 그렇게 따지고 보면 아들 대학 집어넣고 힘들게 살았으니 좀 놀아야겠다며 뜬금없는 황혼이혼을 한 엄마의 인생도 스탠바이가 아닌가. 뭘 원하고 뭘 하고자 하는 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일을 저지르고 보는 엄마도 그렇게 한심하게 여기는 아들의 인생과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은가. 누군들 스탠바이네요하면서 마냥 언제 올지도 모를 인생의 열차를 기다리고 싶겠나. 하다하다 지치면 진짜 이게 내 길인지 싶어 애초의 목표마저도 흔들리겠지만, 이왕에 거기까지 간 거 조금만 더 버티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으니. 최소한 그때까지의 시간과 정성을 봐서라도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와서 다른 곳에 기웃거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고. 마흔의 눈으로 보면 서른도 한창 때이겠지만, 알 수 없는 무기력함에 매일의 호흡이 턱턱 막히는 것은 또 어찌할 것인가. 젠장. 스탠바이. 나도 지겹다, 지겨워. 누군 좋아서 이러고 있나. 할 수 없어서 이러고 있지. 대안이 없는 변화는 무의미하다. 할 수 있었다면 마냥 이러고 있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

헉헉거리는 숨을 참으며 겨우 도착한 곳에는 호루라기를 불고 있는 남색 유니폼의 경비원만이 서 있었다. 에무는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신입사원 실기시험장과 관련된 안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경비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기 혹시 아나운서 시험장이 어딘 줄 아세요? 여기 근처라고 하던데…”

공채 말씀하슈? 이봐요, 여긴 별관이에요, 별관. 공채는 본관에서 하는 거에요. 잘못 찾아 왔구만.” 젊은 사람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만 같아 애무는 재빨리 고맙다는 말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 병신. 그러길래 아까 택시 기사한테 제대로 물어보고 말할 껄. 괜히 본관이라고 우기는 기사 꼴이 보기 싫어 별관으로 왔건만, 에무는 자신의 소심함을 탓하기 시작했다.

9 15분 전. 가까스로 방송국 본관의 철제 문을 통과한 에무는 건물 입구 벽면에 붙은 대기자 명단을 확인했다. 수험번호 38098-251 나에무 스튜디오 A-7 오전 9시 뉴스리딩. 에무는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하고 속으로 스튜디오 A-7’을 되 내이며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그날따라 방송국 네모난 바닥재가 유난히 우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장마철도 아닌데 이상하네라고 생각할 즈음, 그는 어느새 스튜디오 A-7앞에 당도했다.

 스튜디오 A-7이 있는 복도에는 스튜디오 A-1에서부터 A-10까지 총 10개의 스튜디오가 굳건한 방음 문의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잡음으로부터 자유롭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듯했다. 열 개의 스튜디오 앞에는 서 너 명의 대기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대본을 외우고 있었다. 순간 스튜디오 A-5에서 진행요원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정재형! 수험번호 38098-176 정재형!”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리부리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한 대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수험번호 38098-176 정재형입니다!”

군대 훈련장에서 갓 튀어 나온듯한 그 남자의 목소리에 다른 대기자들이 피식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령하는 것처럼 하실 필요는 없구요. 사운드는 저희가 알아서 조절하겠지만, 시험장에 있는 건 초감도 마이크라 평소에 말씀하시듯 하시면 되요. 아시겠죠?”

!”

여지없이 40데시벨에 육박하는 성량으로 답하는 그 대기자를 흘끔거리며 에무는 시간에 쫓긴 자신에게 안정의 최면을 걸었다. ‘괜찮아, 나현석. 넌 할 수 있어. 한 두 번도 아닌데.’

 

**

초감도 마이크는 현석의 생각보다 작았다. 진행요원이 다가와 잠시만 실례할게요하더니 셔츠 안으로 핀 마이크를 빼내어 넥타이 윗부분 옆에 살짝 달아주었다.

, 준비되셨으면 큐 싸인 갈 겁니다. 두 번째 스트레이트 기사부터 갈게요.”

짙은 네이비 컬러의 수트를 차려 입고 스튜디오 안 뉴스 진행자 자리에 앉은 에무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한 손으로 애써 진정시켰다. 옷 매무새를 짧게 다듬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한 번 쓸어 내린 그는 헛기침을 살짝 내뱉었다. 시이자악. 현석이 고개를 끄덕여 카메라맨에게 싸인을 주자 맞은편 정면에 붉은 색 불이 들어왔다. ON AIR.

오늘 새벽 3 10분경, 서울시 강동구 천호동 한 빌라에서 끔찍한 강도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경찰에 의하면 당시 빌라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이모씨와 일가족 3명이……”

. 됐습니다. 다음 8번 기사 가죠.”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씨가 탑승한 우주선이 성공적으로 발사된 이후 처음으로 우주에서 보내온 발신메시지 입니다. 이호영 기자가 전합니다.”

. 수고 하셨구요. 현석 씨는 스포츠에 관심 있나요?”

? 아직 부족한 편이지만 더 관심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우리 채널 메인스포츠 뉴스는 여성캐스터가 진행하는 데 어떻게 봤어요?”

. 매끄럽게 진행 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나현석씨는 더 잘할 수 있겠어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럼 한 번 야구 생중계 5분만 해볼래요?”

?”

아니 편하게. 지금 눈 앞에서 롯데와 두산이 경기한다 치고. 자유롭게 한 번 해봐요.”

 

**

? 야아. 그런 건 내가 전문인데, . 날 부르지 그랬어, 임마.”

지글거리는 불 판 사이로 돼지껍데기를 우적거리며 성한이 말했다.

어이쿠야. 그럴 새가 어딨어. 머리 속이 다 하얗더라.”

그래서 어쨌어? 지어서라도 해야 할 꺼 아냐.”

했지. 하긴. 근데 무슨 말을 한 건지 아직도 기억이 안 나.”

그러길래 평소에 애들이랑 야구장 가자고 할 때 같이 좀 가지.”

그러게.”

솔직히 야구야 어떻게 되든 관심 없었다. 공중파 아나운서 되려고 벅적거리는 야구장을 전전한다는 것도 우스웠다. 되고 싶은 게 있다면,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면 저승사자 밑이라도 기꺼이 닦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성한의 말이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저승사자 좋아하네. 동물원에 호랑이도 덮치면 무서워서 덜덜 거릴 자식이. 넌 군대나 갔다 와라. 서른 되어서까지 요리조리 뺀질 거리지 말고. 저 새끼도 그러고 보니 스탠바이구만. 군대 가기 일보직전.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인간이 어디 있을까 만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관여하는 행위 자체가 경멸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그 또한 스스로 속이 배배 꼬여 남이 옳은 얘길 하면 못 참아 하는 성격이라고 핀잔 받기 일쑤지만. 그렇다고 남이 던지는 얘기, 실제론 그다지 관심도 애정도 없으면서 무심코 흘리는 얘기에 인생이 엎치락 뒤치락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나조차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때가 이리도 많건만, 너인들 알리요. 각자 인생 나름대로의 하자는 알아서 처리하자는 식. 그게 현석이 생각하는 삶의 본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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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서 하는 얘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평소 즐겨보지도 않던 야구중계를 하자니 그깟 5분이 더 이상 그깟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현석이 자신의 정면에 보이는 디지털 시계를 흘끔거리며 이사만루의 상황에 대해 어줍잖은 이야기를 내뱉고 있는 동안 면접관의 표정은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지던 순간 면접관 한 명이 그만, 수고하셨어요!’했다. 매번 느끼는 부분이었지만 면접장에서의 수고하셨습니다만큼 차갑게 들리는 수고도 없지 싶었다. 왠지 뭔가 잘못해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현석씨는 나이가 조금 있네요.”

. 이것저것 경험을 많이 쌓느라…”

우리 회사에는 총 몇 번째 시험 보는 거에요? 작년에도 본 걸로 기록되어 있는데…”

방송사의 기록 시스템은 의외로 치밀했다. 언론고시 스터디를 같이 하던 멤버의 얘기에 따르면 지난 번에 PD로 지원했다 올해 방송기자로 지원하는 바람에 그 이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했다. 솔직히 언론사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원분야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그 에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 들어가기만 하면 신문기자든 방송기자든 언론이라는 명실상부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손에 마이크를 잡건 타다닥 거리며 노트북을 쳐대건 방법은 별반 의미가 없다. 내가 말하고 내가 쓰는 것이 대중의 눈과 귀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짜릿하게 느껴질 뿐인 것이다.

마포 공동체 라디오라….거기는 뭐하는 데에요?”

. 말 그대로 소출력 라디오로써 마포 주민을 위한 방송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잠자코 있던 오른쪽의 여자 면접관이 물었다.

청취자는 몇 명이나 되요?”

현석은 순간 멈칫거렸다.

 

**

, 뭐라고 했어? 한 십만 명은 된다고 하지.”

성한은 태연한 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마포 인구가 사십 만 명인데. 그럼 그 중 사분의 일이 우리 방송을 들었다고 해? 걔네들이 바보냐, 그걸 모르게?”

그래도 임마. 일단 좀 뻥도 섞어 가면서 얘길 해야 심사하는 사람들도 귀가 쫑긋 설 거 아냐. 너도 네 입으로 그랬잖아. 언론사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애들이 매해 수 만 명씩 쏟아지는 판에 경쟁력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안 그래?”

성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파이 자체가 작은 상황에서 지원자는 매해 늘어나니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방송 한 번에 서른 명이 될까 말까 한 청취자를 십만 명으로 둔갑시키고 싶진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공중파에 들어가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벌이는 시원찮았지만 마포 라디오에 있을 때가 훨씬 속이 편했다. 처음엔 몇 명 안 되는 청취율에 신경이 쓰이긴 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수가 중요한 게 아니란 결론에 다다랐다. 애청자들이 올려주는 게시판 후기와 신청곡, 사연 등을 꼼꼼히 읽다 보면 공중파 라디오 부럽지 않은 보람도 느꼈다. 발렌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 때 자그마한 선물을 보내오는 청취자도 있었다. 소소한 낙이 모여 도란도란한 한 때였다. 라디오 방송이다 보니 외형적인 것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어 편한 부분도 있었다. 다른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성형이다 뭐다 할 때 현석은 캐주얼한 복장으로 목 관리에나 치중하는 정도였다. 라디오 방송이라는 게 스트레스가 극심하진 않았지만 매일 조금씩 하는 모양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축적되는 피로가 있긴 했다. 그런 부분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장이었는데역시나 그 놈의 돈이 문제였다.

 

**

현석은 끝내 야구중계가 마음에 걸렸다.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줄곧 굳어있는 것도 그것 때문인 것만 같았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현석의 입사지원서를 넘기는 소리만이 파스락 거렸다. 날렵한 티타늄 안경테를 쓰고 있던 한 남자 면접관이 물었다.

혹시 성형한 곳이 있나요?”

아니요.”

재빠른 현석의 대답에 면접관은 잠시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이어 물었다.

그럼 성형을 하실 의향은 있는 건가요?”

“….글쎄요. 해야 할 곳이 있다면야….”

말끝을 흐리는 현석에게 그 면접관은 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나 요즘은 아나운서도 연예인 못지 않은 미모를 가져야 한다는 게 정설인가 보다. 몸에 칼 대는 것도 께름칠 하고 고칠 돈도 없지만, 외모 때문에 미역국을 먹는 거라면 투자라도 해야지 하는 오기가 생겼다. 그러고 보니 초등하교 동창 놈 와이프가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던 것 같다. 강남역 근처라고 했던가. 수소문해서 거기라도 찾아가봐야겠다. 그나저나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지. 오늘 면접이라고 얘기도 못 했는데. 만년 백수 노릇 하는 게 탐탁지 만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왕에 아들한테 크게 인심 한 번 썼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될지 모를 심산이다.

나현석씨는 왜 아나운서가 되려고 하죠?”

. 저는 국민의 귀와 입이 되고자 합니다. 바른 언어를 사용하고 또한 신속한 정보를…”

아아, 잠깐만!”

현석이 답을 이어나가는 데 면접관 중 하나가 말을 툭 끊었다.

그렇게 판에 박힌 대답 말구요. 진짜 속마음을 한 번 얘기 해봐요. 왜 방송국에 들어오고 싶은 거죠?”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심사가 아무리 지겨워도 그렇지, 세태가 아무리 솔직하고 파격적인 걸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하는 심사가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왜 하필 내가 걸린 걸까. 다짜고짜 진짜 속마음을 한 번 얘기해 보라니. 무슨 얘기를 듣고 싶다는 건지 현석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임기응변에 강한 성한이라면 이때 어떻게 답했을까. 아니 올해 합격자가 될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했을까.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왜 하필 나람.

나현석?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한 번 말해봐요. 우리도 그냥 궁금해서 하는 말이니깐.”

면접관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현석은 죽을 맛이었다. 그 어떤 면접 족보에도 이런 유형은 본 기억이 없었다. 솔직한 대답? 그런 게 왜 궁금하지? 솔직한 대답? 그런 건 나도 없는데. 심사위원의 눈빛과 정면에 보이는 시계가 현석의 대답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현석은 아차 싶었지만, 이왕 뱉은 말을 주어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 모르겠다구요?”

심사위원들은 일제히 황당하다는 듯이 현석을 바라보았다.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이쿠야.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 와 있네요. 허허.”

면접관석이 잠시 술렁였지만 이내 익숙한 말투로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고 현석을 내보냈다. 면접장 스튜디오 문 위에 켜있던 ‘ON AIR’ 불도 풀썩 꺼졌다.

 

**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세대에 자비란 없는 법이다. ‘우리 땐 그러지 않았었는데하며 젊은 세태를 한탄하는 모양새야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매번 규격에 맞는 대답을 요구하는 것도 상 고문에 속하지 싶다. 무기력함에 대고 호통을 치면 돌아오는 건 메아리 없는 한숨뿐이다. 나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좀 알고 싶어요-하는 게 호환마마와 같은 병은 아니지 않은가. 그저 자연스러운 시대의 단상이랄까. 뭐라고 불러도 좋으니 그냥 내버려두어도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현석은 자신이 영원히 스탠바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큐 싸인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런 건 처음부터 없는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게 또 뭐 어떠냐고, 원래 인생도 물 흐르듯, 미래도 물 흐르듯 이뤄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없이 얼굴을 붉히는 세상에 대고 스탠바이이라고 외치는 게 낫겠다 싶었다. , 스탠바아아이-                  

WRITTEN BY B.KANG / JUNE 2008

2008/06/08 22:45 2008/06/08 2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