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영화'에 해당하는 글들

  1. 2009/03/24  hiStory
  2. 2009/01/06  Beyond the Boundaries
  3. 2008/12/23  Being Young in different ways
  4. 2008/10/17  그림이야기_두 번째
  5. 2008/10/07  모던 보이(재)
  6. 2008/10/02  This is not what you see
  7. 2008/09/20  Young@Heart
  8. 2008/08/13  고민하는 영웅 (2)
  9. 2008/07/04  안경 – 삶에 대한 조망 (2)

hiStory

역사는 본질적으로 의 이야기다. 고로 의 이야기들이 모이면 역사가 된다. ‘history’는 그렇게 거창한 개념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사사로이 넘길 수 없는 무언가 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누군가 일수도 아무도 아닐 수도 있는 그의 이야기. 그게 힘을 받는 순간은 바로 개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로 중첩될 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랜디_더 레슬러

퇴역을 앞둔 레슬러 랜디는 본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을 랜디라고 불러주길 원했다. 로빈이라는 평범한 이름보다는 레슬러 랜디가 자신을 더 잘 표현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랜디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와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자신을 일치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결국은 그를 위해 링 위에서 죽음까지 고사한다. I see what you don’t see. 최근 길을 가다 우연히 본 문구가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랜디의 삶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환호성과 남들이 보지 못하는 환영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바로 링 위에서 펼쳐졌다. 비록 그가 실패한 삶의 주인공이고, 목숨이 내일모레하는 상황에 처해있지만, 그는 바로 순간에 전적으로 살아있고, 전적으로 히어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말_슬럼독 밀리어네어

대니 보일이 신작으로 눈길을 끌고 있는 이 영화는 자칫 시티 오브 갓을 떠올리게 한다. 이국적인 정취와 빈민가에 버려진 아이들, 그들의 기구한 운명. 혹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자말의 이야기가 식상하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하듯 열린 결말이나 비극에도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다. 영화를 통해 자말 말리끄라는 이름은 수십 번도 더 호명된 것 같다. 포기하지 않는 사나이. 평범한 성질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절대적으로 비범한 삶을 산 뭄바이 출신의 청년. 그의 인생에 대한 퀴즈의 정답은 그의 삶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였다. 그러나 결국 그 예정된 삶을 살아낸 것은 온전히 자말의 몫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일. 우리는 그렇게 매일 그가 아니면,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시간들을 묵묵히, 또는 멋지게 이겨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루디_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파니 핑크이후에 다시 접하는 도리스 되리 감독의 근작에는 개인적으로 낯익은 도시들이 등장한다. 바이에른의 알고이, 베를린, 그리고 도쿄. 그리고 또 독일어. 독일 가곡을 들을 때나 독일 시를 읽을 때 느끼는 것이지만, 독일어는 모든 언어가 그렇듯 고유의 색채를 가지고 가장 적절한 장르에 빨려 들어가는 맛이 있다. 비록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나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이 조금 불편한 감이 있지만. (쩜쩜쩜) 그래도 독일감독이 이 정도로 동양적인 감성을 가미해 연출을 선보였다는 것이 놀랍다. 죽음과 그 이후의 남겨진 이들의 삶에 대해선 많은 영화들이 많은 이야기를 해왔지만,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또 새롭다.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 남자와 여자, 파리와 손수건은 어쩌면 너무나 다르지만 알고 보면 가까이, 같은 존재로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라고.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정말 지구종말이 가까워진 게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에 잠겨있다거나, (솔직히 그렇게 엉뚱한 것 같지도 않다. 지구의 막장 드라마가 여기저기서 펼쳐지니깐) 억울하게 진 WBC 결승전에 분함을 미처 떨쳐버리지 못했다면, 추운 겨울 혀 끝 뿌리까지 덥혀주는 어묵국물과도 같은 이 영화들을 목구멍으로 스르륵 넘겨보자. 쿨해서 징그러운 세상사에 핫(!)하게 좀 찡해보자.

2009/03/24 23:43 2009/03/24 23:43

Beyond the Boundaries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 <누들>의 주인공_루이(좌)와 미리(우)


최근 하마스 세력을 소탕하려는 이스라엘 정부의 무자비하기까지 한 무력행사를 보고, 머나먼 땅 우리에게 이스라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평화로운 일상 곳곳에 언제 터질지 모를 전운이 감돈다는 것은 분명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신경의 반경, 그 너머의 일임에 분명할 것이다. 단순히 어린 시절로 돌아가 동생이 한 대 먼저 쳤으니, 나도 너를 치겠다는 식으로는-도저히 그 어마어마한 사태를 이해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언제 어떻게 해결 가능한 문제인지도 모르고, 비극이라는 단어 이외에 이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있는 지도 모른다. 모든 싸움, 그리고 모든 전쟁이 그렇듯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호해지는 접경에서 그에 가담한 이들은 인간의 무감각한 성질에, 폭력을 뛰어넘는 그 이유에 넌더리를 칠 것이다. 결국 칸트는 설 자리를 잃고, 홉스의 망령만이 스멀스멀 피어나리라.

그러나 상황에 대한 이해는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지난 해 개봉했던 아일레트 메나헤미 감독의 <누들>은 전쟁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미리)이 겪은 삶의 참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잔인한 일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특히 그녀가 얼떨결에 맡게 된 중국인 소년(루이)과 조금씩 가까워질 무렵, 너무나 간단한 제스처로 그녀의 가족의 죽음에 대해 설명할 수 밖에 없었던 장면은 그들에게 당연한현실이 더 이상 당연하게 여겨질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남편과 두 번째 남편, 그리고 남겨졌던 두 명의 아이들의 목숨까지 앗아간 전쟁을 겪으면서도 그 땅(이스라엘)에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운명. 그들에게 있어 희망은, 그리고 평화란 무엇일까.

보통의 사람들은 이라 명명한 대상을 죽도록 증오하며 살아간다. 결국 그 증오가 복수라는 바깥의 피를 부르기도 하고, 체념이라는 안의 피를 흘리기도 한다. 꼭 십 년 전에 들었던 정당한 전쟁은 있는가라는 정치철학 세미나가 문득 떠오른다. 그 중에 그 누구도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렇게도) ‘쉽게전쟁에 대해 떠들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은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고, 중재자는 그저 중재자일 뿐이다. ‘이성의 위기라고 굳이 떠들지 않아도, 인류의 이성이 마비되었음은 오래 전 일임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영화 <누들>에서처럼 전시상황에서도 생각하기 힘든 방법으로 기적이 일어난다. 세상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어, 그렇게 말이다.   

2009/01/06 22:39 2009/01/06 22:39

Being Young in different ways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NYT


구스타보 두다멜 &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

지금부터 딱 열흘 전이었다. 여러 클래식 잡지나 신문, CD가판대, 유튜브를 통해 전방위적으로 자자한 명성을 확인했던 것이 말이다. 서른도 안된 나이로 최정상의 자리에 오른 차세대 지휘자들 중 하나 구스타보 두다멜과 그를 배출한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의 자랑,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가 (귀한) 방한을 했다.

이틀 간의 공연 중 14일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공연은 그들의 주 레파토리인 번스타인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와 말러의 교향곡 제1번 이었다. 너무도 대조적인(!) 음악적 색깔을 보여주는 두 선곡을 통해서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두 곡 다 대형오케스트라에 어울릴 만한 곡이라는 점 외에는 미국과 유럽을 대표하는 작곡가와 (세미클래식과의)뮤지컬과 정통 교향곡이라는 대척점에 서 있는 곡이라 해도 무방하다. 조금은 긴장한 듯한 두다멜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통해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연주 마지막에는 3-5분 정도 굽힌 몸을 펴지 않은 채, 마지막의 음악적 여운을 한껏 들이마셨다. 활 시위끼리 부딪힐 정도의 역동성과 언뜻 언뜻 웃음지었던 마림바 연주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타 아이돌 그룹과는 달리 늘상 즐기는 모습으로 무대를 휘젓는 빅뱅의 모습과 유사했다. .. 바로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들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조금 더 특별했다.

말러 교향곡 제1번은 말러가 독일의 낭만주의작가 장 파울의 소설 <타이탄>이란 소설에 영감을 받아 만든 일종의 성장소설과도 같은 인상을 남긴다. 슬프고 우울한 정서가 많이 담겨 있지만, 그 와중에서 청춘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그린 이 곡을 진지하고도 공감하는 느낌으로 빚어낸 것이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의 장점이었다. 비록 개인의 역량은 다른 청소년 오케스트라에 비해 뒤떨어질 지 모르겠지만, 하나의 큰 음악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으로서 그들은 완벽에 가까웠다.

그들을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시종일관 진지하면서도 즐길 줄 아는 면모를 풍겼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음악 안에서 찾고자 하는 그들에게 슬픔과 연민보다는 유희와 여유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남미 특유의 낙천주의와도 맞닿아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깊이 울리는 감동을 선사했다.

그들에게 젊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presence), 그 자체다. 가진 것이 애초에 없었기에 당장 잃을 것이 없다는 현실은 그들을 한층 강하게 만들었다. 젊다는 것은 자만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 자체만으로 눈부시고, 그 스스로 강한 것이다. 그리고 스물 여덟의 지휘자 두다멜과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는 젊었다. 있는 그대로 젊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Young@Heart

일전에 블로그를 통해 소개한 바 있는 영화 <로큰롤 인생, Young@Heart>가 막을 내리기 전에 가까스로 보았다. (블로그 글 다시보기) 아트선재센터에 위치한 아트홀이 특별히 월요일 조조를 파격적인 가격(삼천원)에 내놓고도 모자라, 관객들에게 영화 시작 전 직접 만든 커피와 머핀을 제공하는 등 감동서비스를 제공하여 매우 훈훈한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음을 덧붙인다.

뉴 햄프셔에 사는 7-80대에 놓인 젊은실버세대들이 지난 20여 년 간 꾸려온 합창단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는 지난 2008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도 큰 호응을 받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흔히들 신파조의 휴먼다큐멘터리를 상상하기 쉽겠지만, 놀랍게도 이 영화는 매우 다이내믹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몇 편의 직접 제작한 뮤직비디오와 공연실황과 동행취재 및 인터뷰로 구성된 <로큰롤 인생>은 지금 우리의 모습, 또는 다가올 우리의 모습을 위트 있는 시선으로 조망한다.

늙어간다는 것은 비단 젊다는 것의 반대말이 아니다. ‘젊다는 것도 그저 일정한 시간 축 안에서 임의적으로 그 상태를 지칭하는 것일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피상적인 말이지만, ‘젊다는 것은 이러한 외형적인 지시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마음으로 젊고자 하고 행동으로 젊음을 발산한다면 그/그녀는 충분히 젊은것이다. 이 영화는 더 나아간 관찰을 남긴다. 이 곳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시간을 멈추려 하지도 않고, 죽음을 마냥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삶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이고, 그것이 바로 젊음의 유지 비결이라고 속삭여준다.

하나의 공연과 하나의 영화는 너무나도 넓은 연령과 장르, 문화권의 스펙트럼을 선사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것은 동일하다. Being Young에서 Forever Young으로의 이행. 나 혼자만 폭삭 늙어버린 것 같아 약간은 속상하다.

2008/12/23 17:18 2008/12/23 17:18

그림이야기_두 번째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슨 가을날씨가 이렇게 포근한가 싶을 정도로 알흠다운 날의 연속이다. 2년 전 이맘때쯤, 영화하는 친구에게 훌륭한 감독이 되라(에휴) 선물로 주어 이 또한 내 수중에는 없는 그림이올시다. 그때 아마도 영화사 수업에 혼자 심취하셔서 필름 누와르를 즐겨봤던 것 같다. 잘 차려 입고 열심히 범죄를 저질렀던 그 흑백영화들의 주인공이 알쏭달쏭한 포즈로 같은 듯 다른 사과를 반쪽씩 들고 있고(이는 모 사진에서 모티브를 얻었음을 밝힘) 뒤로는 에스컬레이터(그날 유난히 에스컬레이터가 눈에 띄었음)가 언뜻 보인다. 중요한(?) 머리는 과감히 제거했는데, 당시 즐겨보던 미드 <하우스>의 타이틀에서 살짝 훔쳐와서 빈 공간에 ‘Directed by 아무개하는 식으로 싸인 해서 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보면, 내가 좀 수트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그 친구는 아직도 학교 편집실을 헤매며 열심히 감독될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그 알량했던 모습 모두 세파에 녹슬어 버린 것 같아 은근 씁쓸한 날이다.

+순전히 사견이지만. 요즘엔 성악한다는 것보단 뮤지컬 한다가 낫고, 영화 한다는 것보단 글 쓰는 게, 파인 아트보단 미디어아트 한다는 게 낫게 들린다. 돈과 주류에 동승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원래의 자리를 지킨다는 게 뭐 뚝심 있어 보인다기 보단, 그냥 왠지 모르게 안쓰럽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워낙 참 예술이란 게 그렇다. 쩜쩜쩜. (할 말은 무지 많겠으나, 애써 참고 있는 1人 ☞☜)

Creative Commons License
강보라에 의해 창작된 그림이야기_두번째 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8/10/17 11:22 2008/10/17 11:22

모던 보이(재)

어제 밤, 너무 흥분을 한 탓에 오늘 다시 차분한 마음으로, 딱 두 부분만 지적하려 한다. 주변을 살펴보니 <모던 보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감독에 대한 실망감이 가장 컸던 것 같고, 배우들에 대한 부분이 그 다음을 이뤘다. 아예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면 이렇게 흥분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될듯한 것이 안 되어 그런지 안타까움, 실망감, (약간의) 분노, 연민 등이 섞여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 지 모르겠다. (이것도 다 오버라는 거 안다. 그 누구도 내게 이래 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하긴, 동시에 그 누구도 내게 이러지 말라고 할 권리도 없지 않은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문제1. 생략 혹은 생략된 서사

돌아서고 보니 두 편의 영화가 생각났다. 하나는 이명세의 <M>이고 두 번째는 이안의 <.>였다. <M>과 같은 식으로 서사보다는 이미지가 중심으로 작용하기엔 <모던 보이>는 어정쩡한 지점이 너무나 많았다. 되려, 이미지에 무게중심을 실어주고 자잘한 이야기 가지들을 과감하게 쳐냈다면 나았겠단 생각도 든다. ‘생략자체에 딴지를 거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럴 경우엔 이미지 간의 설계가 정교해서 그 나름의 이야기가 탄력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 영화의 근간이 되는 박해일과 김혜수 간의 (운명적) 러브라인 조차 설명이 안 된다. 관객이 둘 간의 사랑 또는 운명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는 상태에서 인물이 고뇌하거나 변화하는 모습은 더더군다나 설득이 되질 않는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공 들인 이미지는 미장센 과잉으로 격하되고, 스토리의 부실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다양한 촬영적 시도는 높이 살 만하지만, 그것이 일정한 도를 지나쳤을 경우엔 되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지나친 흔들림과 포커스 아웃은 영상적 미학이 아니라 폐쇄적인 문법으로 간주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눈이 피곤하다고 느끼는 것은 장시간 앉아있어야 하는 영화라는 매체에겐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도 있다.)

 

문제2. 유혹

극중 조난실을 보며,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나 인생관이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흔히 말하듯, 치명적이어야 한다. 친일+날나리+모던 보이 이해명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혼이 빠질만한 상대여야 한다는 얘기다. 엇비슷한 이야기 구조로 이안의 <.>를 떠올렸다. 특히 김혜수와 탕웨이를 같은 선상에 놓고 보니, 차이는 한결 명백해졌다. 여배우가 인물을 연기하며 뿜어낼 수 있는 에너지는 (감히) 무한한 것이라 봐도 좋다. 특히 외형적 조건이 완벽한 배우가 연기력까지 겸비했다면, 그녀()에게 거는 관객의 기대감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극중 남주인공을 몇 번 흘겨보고 옷 자락 몇 개 떨어뜨린다고 해서 팜므파탈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카메라 뿐 아니라 그 너머의 관객의 목젖을 타고 흘러내리는 침까지도 완벽하게 콘트롤한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아니, 그를 넘어서 그게 가능해야 한다. ‘감 나와라, 배 나라와라하는 식의 리뷰가 딱 빵점인 것은 알지만, 팜므파탈이 팜므파탈일 수 없을 때 느끼는 좌절감은 그보다 더 빵점이다. 흔히 말하는 와 같이, 팜므파탈은 묘한 분위기 하나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을 하는 것과 정말로 그런 것과는 정말로 다른 문제다. 특히 <모던 보이>를 놓고 봤을 땐 그렇다. (관객이 유혹당하고 싶어 죽겠는데, 유혹을 안 해주면- 게다가 남자주인공까지도 유혹 안 해주면. 어쩌지. 그땐 정말 어쩌지.ㅠ)  

2008/10/07 20:43 2008/10/07 20:43

This is not what you see

시각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던 올해 초, 과 동기의 추천으로 접했던 스페인 계열의 영화 <The Blind Spot>. 언어의 제약상(!)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촬영/편집적인 관점에서 보면 꽤 괜찮은 영화다. 특히 도입부부터 계속되는 화면분할 안에 담기는 내용들이 시선을 분산시키면서도 동시다발적인 인지를 가능케 한다. >> vimeo 바로가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남미나 스페인 영화를 접할 때면 묘한 느낌을 갖게 된다. 언어 자체가 안고 있는 지역성과 문화성이 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음율만으로도 무언가를 전달받는 착각을 낳게 한다. 특히 그들의 땅에 발 닿아본 이들은 이해할 것이다. 스페인 특유의 감성이 피부 바깥을 타고 파다닥 타오름을.

2008/10/02 10:02 2008/10/02 10:02

Young@Heart

지난 19일 막을 내린 제4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Young@Heart>가 올 겨울 개봉을 앞두고 화제다. 매사추세스주의 오십 명 남짓한 노인들이 모여 Rock&Roll공연을 올리기까지의 여정을 담담히 담아낸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화려한 등장인물이나 극적인 드라마 없이도 잔잔한 감동을 준다. (관련기사 링크) 최근 죽음과 죽어감이란 책을 접하면서 생각하였던 늙어감과의 조우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노인인구가 청년인구를 넘어서는 건 시간문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평균수명 80세 이상의 시대를 살아가며 지금 젊다는 것에 호기를 부려서는 안 될 것 같다. 늘 마음 한 켠에 추하지 않게 늙어갈 수 있는 무언가를 간직하고 싶다. 그래야 비로소 삶 앞에 겸손해질 수 있지 않을까.

 

+<Young@Heart> Trailer와 가장 감동 깊은 씬 중 하나로 알려진 Coldplay‘fix you’ 클립을 업로드한다. 올해 겨울, 특별한 영화와 만나보시길.  




2008/09/20 22:30 2008/09/20 22:30

고민하는 영웅

미국의 블록버스터가 변하고 있다고 예견된 건, <다크 나이트> 개봉 훨씬 전부터의 일이었다. 심플하기 짝이 없는 권선징악의 거대명제 아래 볼거리만 풍성하면 빈약한 서사도 다 덮어주겠다던 것이 미 블록버스터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슈퍼맨’, ‘스파이더맨등으로 이어지는 코믹북 영웅 계보에도 이와 같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쳐 영웅 서사의 진화가 이상 징후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각각 영웅으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변종이 된 계기는 각기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람의 힘으로(, 치안, 공권력 등등)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공동체의 안녕을 21세기적 켄타우루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에게 일임하는 식의 극 설정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스파이더맨 3>에서 보여진 바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추앙 받았던 영웅은 더 이상 절대 선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자신이 지키고자 노력해 왔던 가치들과 절대 선의 문제에 대해 반문한다. 원론적이지만,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절대 선은 존재할 수 있는가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다크 나이트>는 여러모로 기대가 많았던 작품이었다.
히스 레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면에서나 영원한 조각남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새로운 배트맨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기대심리에서나 <다크 나이트>의 개봉을 앞두고 밤잠 설칠 이유는 꽤나 많아 보였다. 대형 포털의 거의 만점에 가까운 별점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크 나이트>에 대해서 약간은 염려스러운 시각을 던져볼까 한다. 누구나 이미 백만번쯤은 이야기했든, 조커 역의 히스 레저는 살아있는 조커의 모습을 완벽 그 이상으로 재현해 내었고, 외모로 차가운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크리스찬 베일은 배트맨 중 최고였다고까지는 못할 망정 2등 정도는 되었다. (사담이지만, 그의 최고작은 뭐니뭐니해도 <아메리칸 싸이코>가 아닐까.) 배트맨의 연구소는 돈 냄새를 하도 풍겨 관객의 후각이 마비될 정도였고, 건물 몇 개, 도시 하나 쯤은 뻥뻥하고 초토화시키는 영상은 블록버스터 상위권 안에는 안정적으로 안착할 듯 보였다.

 

그러나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가면 쓴 영웅을 필요로 하는가. 더 디테일하게 질문하자면, 우리는 고민하는 가면 쓴 영웅을 필요로 하는가. 대답은, 글쎄요,. 예를 들어 본 시리즈제이슨 본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시스템의 최고 선에 대해 도전하는 류와 배트맨은 시작점부터가 다르다. ‘의 고민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배트맨의 고민은 글쎄. 후작을 만들어 내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는 듯 하다. 세계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홉스가 장담했던 대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구도로 나아가는 가운데 배트맨과 같은 초월적 수호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했을 법하다. 그러나 그 고민은 제작자와 감독의 것이지, 그를 직접적으로 주인공의 입을 통해, 서사를 통해 드러났어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조커가 왜 끊임없이 살상을 저지르고 파괴를 일삼는지에 대한 이유는 전혀 설명해 주지 않으면서 배트맨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선의 개념에 대해서 원초적인 물음을 던지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 개념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그의 절대성을 인정해주는 대신 의 개념은 선한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악을 낳으면 그것도 선인가하는 식의 사고로 상대적으로 추락시키는 느낌을 준다. (그렇게 허술한 논리로 배트맨이 됐을 거면, 애초부터 만들어내지 말지 그랬냐는 비판도 종종 들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슈퍼맨’, ‘스파이더 맨과 더불어 배트맨에서 공통적으로 관객이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바로 초인이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담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는 조커가 지적하는 바대로 너 같은 변종은 나와 같은 존재야라고 반격당하기에 좋은 부분이기도 하다. , 영웅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를 추종하며 그의 보호 아래 있었던 다수의 사람들은 요동하기 시작한다. 그의 존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있어야만 완전해질 수 있는 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OO하는 류의 미국 영웅이 철저히 인간의 시점으로 돌아와 선에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라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모습이 (이해는 십분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언젠가 정치철학 세미나 때 정당한 전쟁은 있는가란 질문을 던졌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선이든 악이든 하나의 행위로 인해 파생하는 결과는 늘 양면적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선 다면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는 (모순이지만) 선택적이면서도 비선택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말인 즉, 그가 예측가능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왜 배트맨은 조커를 죽이지 못하는가. 죽이지 못하는 것이 절대 선인가. 아니면 절대 악으로 상징되는 그를 제거하는 것이 절대 선인가.’라는 질문)

 

고민하는 영웅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영웅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은 달달하면서도 쌉쌀하다. 영웅을 섣불리 짬짜면면으로 만들게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냥 단순명료했던 옛날의 촌스런 영웅이 그립다. (사는 것도 복잡해 죽겠는데, 왜 영웅까지 복잡하고 난리야!)    


2008/08/13 16:16 2008/08/13 16:16

안경 – 삶에 대한 조망


난 알고 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Mir ist bewusst, was Freiheit bedeutet.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기가미 나오코의 두 번째 영화 <안경>은 중반부쯤 한 인물의 입을 통해 자유에 대한 꽤나 그럴싸한 몇 마디를 읊조린다. (그것도 독일어로) 남자의 독백이 흐르는 가운데 에메랄드 빛으로 가득한 바다와 바닷물의 끄트머리에 잔잔히 부서지는 하얀 파도, 그리고 그와 눈부신 띠를 만드는 고운 모래. 해변가에 한가로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인물들 위로 카메라는 유영하고, 남자는 말한다. 난 알고 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난 알고 있다.


자유박탈 + 여유결핍

 

참 이상할 노릇이다. 오늘의 우리는(적어도 내전이 일어나는 지구촌 몇몇을 제외하고서는) 자유가 박탈된 적이 없었다. 외형적으로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자유가 있었는지도 까마득하고, 아니면 원래 자유라는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중에 홀연히 사라진 건지 가물가물하다. 여유라는 녀석도 마찬가지다. (같은 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는 레저라는 이름으로 여유를 포장하고, 보기 좋게 진열하여 얼마에 드릴 테니 이번 기회 놓치지 마세요하면서 끊임없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참 우스운 일이지만, 무형적인 뭔가를 판다는 것은 사천만의 봉이 김선달을 복제해낸 것과 맞먹는 충격을 주곤 한다. (아니 어떻게 내 인생을 가 책임지며, 아니 어떻게 내 행복을 가 파는 것인가.) 어떤 가치가 포화된 상태는 그것이 부재할 때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일까. 곁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비가시적인 무언가를 찾아서 떠난다는 게 무슨 소용이며, 그게 찾아진다고 찾아지는 것일까. 이내 자포자기하며 자리에 누워버린다. 에라이, 모르겠다. 알게 뭐람. 그깟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어쩔 줄 몰라,

 

너나 할 것 없이 흔히 발견되는 현대인의 증상은 바로 어쩔 줄 몰라,’()이다. 처음 만난 이들끼리는 물론이거니와 수 십 년을 맞대고 살아온 가족 간에도 밥상을 마주할 무렵 어쩔 줄 몰라하는 경우가 적잖다. 젓가락질 몇 번에 먼산은 열 댓 번 쳐다보는 식이라면 설명이 쉬우려나. 대화의 부재, 소통의 부재가 문제라지만, 정작 더 문제는 어쩔 줄 몰라’()이 심각해져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순도 100퍼센트의 사족(蛇足)’이다. 한 마디로 필요 없는데도 막무가내로 껴주는 특별사은품같은 존재라는 거다. ,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하루에 꼭 필요한 말은 과연 몇 개나 될까. 나는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가. 관심이 있어서인가, 진심이었나, 그냥 무뚝뚝한 순간을 대체해보려는 수단이었나, 팔을 비비 꼬는 민망함을 모면하기 위한 술수였나. 그 많은 말을 왜 했을까. 그 많은 행동을 왜 했을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알고 보면은. . 결국 어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심각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색에 대한 면죄부

 

영화 속 한적한 하마다 여관을 찾은 타에코(고바야시 사토미 분) 또한 처음 섬마을 사람들의 사색에 적잖이 당황한다. 사색이라, 사색이라니. 애초에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지구 같은 거 없어져버렸으면했던 그녀의 마음도 하마다 여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저 휴대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으로 떠나고팠다는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낯섦, 그 자체였다. 상상컨대 그녀 또한 (우리처럼) 쉴새 없이 진동이 울려대고, 하루에도 수십 건의 스팸 메일을 삭제하고, 필요하건 불필요하건 사람들과 부딪히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무언가를 구입하고. 소비의 연속 가운데 정작 가장 빨리 소모되는 것은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 채, 모든 것을 대도시의 리듬에 맡겨버렸으리라. 그런 생활을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반복하면서 갑작스레 맞이한 휴식 가운데 주어진 시간이라니! 무릎이 한껏 튀어나온 트레이닝 복을 입고, 집 앞 슈퍼에서 첫사랑과 우연히 조우했을 때보다 백만 배쯤 더 어쩔 줄 몰랐으리라. 그렇게 당황한 그녀를  하마다 여관은, 영화는 보채지 않고 느긋이 기다려준다. 그녀가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관객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그래서 사색이 하릴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잉여활동의 일부로 폄하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뭐라던 간에 존재가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는 한 뼘 남짓한 시공간을 선사하는 둘도 없는 선물임을 깨우친다. 그렇게 <안경>사색이 담배 한 가치 물면 자동으로 하고 나타나는 게 아님을, ‘여유가 홈쇼핑 채널의 패키지 상품으로 구입할 수 없는 것임을 찬찬히 훑어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느리게 걷기

 

정작 동명의 까페에 가면 그다지 느리게 걷는다는 느낌이 나질 않는다. 소비가 소비를 소비하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찾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대신 이것을 상상해 보라. (영화에서 힌트를 얻었으니, 영화를 일단 보()는 게 도움이 될 듯.) 일체의 기기를 버리고 적막가운데 처하라. 그곳이 자연과 근접해 있는 곳일수록 좋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잠시 어딘가로 치워둬라. 필요한 건 자신의 몸뚱이와 정신, 그거면 족하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정하라. (처음엔 여기저기로 시선이 쏠리겠지만) 한 군데를 응시하고 마냥 고정하라. 그리고 지겨워질 때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라. 그 가운데 누군가를 떠올린다 던지, 지나간 사건과 시간을 되짚어본다 던지, 일어날 일 혹은 하고자 하는 일을 상상해 보는 것도, 아니면 영 엉뚱한 무언가에 대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사라졌던 감각이 되살아날 것이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될 것이다. 매일 먹는 밥알에도 색깔이 있고, 향취가 있으며, 고유의 맛은 물론이거니와 일종의 여운까지 남김이 새삼스레 느껴질 것이다. 주변의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지럽게 정신을 수 놓았던 망상들이 하루아침에 말끔히 정리되었음에 안도할 것이다.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이렇게, 별 게 아니다. 그리고 별 게 아니라고 여기는 만큼 하찮게 치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대로 시류에 동승하지 않는다는 인상에 나만 뒤쳐지고 있다는 불안감을 주조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는 느리게 걷기를 거부해왔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함을, 더 늦기 전에 알아채야() 한다.

 

영화 <안경>을 보면서 주말농장에나 가봐야겠군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삶에 대한 조망이라는 것은 인위적인 요소들을 한 곳에 진열해 놓는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숨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찾아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하루가 걸릴지, 평생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아련하기에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 준비 되었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안경을 벗고, 나만의 안경을 찾아 떠나보자.   



2008/07/04 08:58 2008/07/04 0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