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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17  열정을 담는 그릇, Producers
  2. 2009/06/10  Follow Your Instinct (2)
  3. 2008/06/08  스탠바이 (2)

열정을 담는 그릇, Produc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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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 영상제작회에 참석했다. 세상은 어쨌든 좁아서 이래저래 건너 아는 사람들을 꽤 만나게 되었다. 일단은 짧은 파일럿을 만들기 위해 모인 자리였는데, 기획팀에서 후반 작업 팀까지 다양한 인력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그 동안 학교 연구실을 통해서도 간간히 외부작업을 하는 이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교육적이거나 홍보성이 아닌 (상업적) 작품위주의 만남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정작 영상원을 다닐 때는 현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모든 게 지나가면 알싸하게 다가오는 것인지. 역시 현장사람들은, 아차차, 괜찮은 현장사람들은 달랐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사람은 둘 이었다. 한 분은 전체 프로듀서였고, 다른 한 분은 사운드프로듀서였다. 둘 다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프로듀서라는 직함은 같았다. 전체 프로듀싱을 맡고 있는 친구는 붙임성이 좋았다. 눈썰미도 빨랐고, 한 사람 한 사람 빠뜨리는 이 없이 골고루 챙길 줄 알았다. 그 와중에도 감독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었다. 쭉 미술을 해왔다는 그는 영상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계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다, ‘남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고 했다. 자기 색깔도 있었고, 하고 싶은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그런 친구들은 대부분 고자세이기 마련인데, 의외였다. 예의 바르면서도 당당했다. ‘모르는 게 많으니 가르쳐달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은 은연 중에 피력했다. “저 또한 창작하는 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 프로듀서네요.” 발그레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 뒤로 작은 프로를 하나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어쩌다 보니가 아닐 것이다. 화선지에 먹물이 퍼지듯, 프로듀서로서의 기질이 조금씩 퍼져나가는 것이었을 게다. 열정이 있으면서도 긍정적인, 그러나 굉장히 현실적인 이 사람-바로 프로듀서다.

사운드프로듀서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한 (음악)감독님은 일전에 다양한 공부를 하셨다.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이후 CalArts에서 영상음악을 전공하고 동시에 종교음악을 공부하기도 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차라리 많이 알지 못하고 보고 듣는 것이 훨씬 좋았을 법했다고 하시던 그분의 눈은 마치 어린 소년 같았다. 스필버그와 칸노 요코와 만났던 일화들을 들으면서도 이렇게 겸손한 분이 또 있을까 싶었다. 스스로 이병우와 같은 음악가는 될 수 없다고 여겼기에 사운드를 엔지니어링하고 전체적으로 디자인하는 프로듀서가 되었다고 하는 그분의 고백이 순수예술을 흠모하면서도 늘 주변을 헤매는 듯한 내 그림자에 한 줄기 따스한 위안을 해주는 것 같았다. “난 사운드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한 학기 내내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라고 해요. 매일 한 장씩 그림을 그리라고 하고, 그 그림을 소리로 표현해 보라고 주문하죠. 하하 그게 내 사운드 수업이에요.” 문득 왜 이런 수업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걸까, 회의가 들었다. “이미지는 1차적으로 지각하지만, 소리는 2차적으로 인지하죠. , 한번 생각하고 난 다음에 소리라고 인식하는 겁니다. 저는 영상에서 소리가 차지하는 부분이 전체의 30프로라고 봐요. 무척 크죠. 그런데 그 30이 나머지 70의 부분을 100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고, 거꾸로 70도 못되게 하기도 해요. 그럴 땐 정말 눈물 나죠.” 부분에 일하면서도 전체를 보는 시각, 그리고 스스로를 있는 듯 없는 듯 하게 만들며 조화를 이루는 이 사람-바로 프로듀서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 중에서 프로듀서만큼 험한 일을 가장 많이 하면서도 전체 팀원들을 끊임없이 독려해야 하는 포지션도 없지 싶다. 다양한 모습으로, 그러나 철저한 프로의식으로 가득 찬 그들의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큰 도전을 받는다. , 심장이 뛰고 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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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라 에 의해 창작된 열정을 담는 그릇, Producers 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06/17 18:03 2009/06/17 18:03

Follow Your Instin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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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창작에 관해서는 가장 솔직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나리오 쓸 때 담당 선생님께서 권해주셨던 책인데, 여러분들에게도 적극 추천합니다.>


유명한 소설가가 한 분 계셨습니다.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문하생을 구하지 않느냐고 여쭈었습니다. “난 그런 것 안 합니다라는 대답만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재미있는 일을 찾으세요. 나도 최근에 그랬으니깐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성공한 멘토가 한 분 있었습니다. 미래계획을 물으셨죠. 답을 했지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시더군요. “왜 여러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죠? 한 가지에 집중하세요.”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그리곤 당신의 여러 곳의 일들을 위해 걸음을 돌리더군요.

당신이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더 넓게는 창의적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엄연히 말해 이름을 알린 선배 예술가도 힘 있는 유명인도 당신을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특히나 매일의 선택 가운데 놓여, 어디로 가야 할 지 1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이 어떠할 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면 더더욱 말이죠. 한 때는 기대했던 게 사실입니다.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이, 롤 모델이 될 법한 이-들로부터 나의 삶을, 그 지평을 드넓게 해 줄 수 있는 한 마디를 말이죠. 그러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절대 누구도 당신의 질문을 대답해 줄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그 답이 당신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민이라는 개념을 깨우치기 시작한 청소년기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몇 년간 당신은 무척이나 다양한 이유들로 밤잠을 설칠 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처럼, 과거와 달리 지식이나 부도 안정된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사회 안에서는 고민의 깊이가 한층 더하겠죠. 그래서 우리는 쉽게 그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마련입니다.

위의 두 가지 예처럼 성공한 이의 삶을 답습할 수도 있고, 그로부터 조언을 얻으려고도 노력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이들과 다른 삶을 살 수 밖에 없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표피적인 말들에 좌지우지 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당신이 닮고자 하는 누군가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쉬이 책임지려고도 하지 않거나 자신에게는 공정하게 적용하지 못했던 말들을 다른 이에게는 쉽게 던지게 됩니다.

이보다는 자칫 불안정해 보이지만, 확실한 방법은 자신의 본능을 따르는 겁니다. 스스로 느끼는 재미와 행복, 그 이상의 답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다고요? 너무 근시안적이라고요? 미안한 얘기지만, 어차피 장기적인 계획대로 진행되는 삶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설사 계획세우기가 취미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사는 분들은 굳이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더 살아갈수록, 삶은 계획처럼 예측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겁니다.

물론 본능만을 믿고 따르기엔 불안한 요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를 즐기기 시작한다면, 그에 내어 맡기기 시작한다면, 최소한 당신의 정신적 부담감은 한층 덜 하지 않을까요? 열심히 사는 사람은 눈에 쉽게 보이지만, 재미있게 사는 사람은 드무네요. 어깨 너머 자신의 본능대로 살고 있는 이들을 부러워만 말고, 까치발을 서서히 내려놓으세요. 이제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만 살아가는 겁니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고,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바로 당....    

2009/06/10 15:03 2009/06/10 15:03

스탠바이

스탠바이



총 칠백 정도 예상하시면 될 것 같네요.”

? 치치치치치치치일백이요?”

 

 남자의 안구가 눈꺼풀을 휘 집고 나오는 듯했다. 뱅그르르 도는 도수 높은 무테 안경을 쓴 창백한 얼굴의 여의사는 뭘 그렇게 놀랐냐는 듯이 그를 다시 쳐다본다. 남자는 귀를 의심한 듯 다시 물었다.

 

아니, 요즘 가격 많이 다운됐다는데 이거 좀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저희는 원래 코스트보다 퀄리티 위주로 가기 때문에 다른 곳과 비교하시면 좀 곤란해요.”

아무리 그래도선생님. 물론 제가 선생님이 이쪽 업계에선 최고라는 거 잘 알고 있지만그래도 제가 생판 남도 아니고. 어유. 제가 이래봬도 명환이 그 자식이랑, 아니지.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박명환 선생이랑 불알친구에요, 불알친구.”

환자분. 공과 사는 좀 구별해 주셔야죠. 제가 저희 허즈번드, 그러니깐 우리 닥터 박 친구들, 특히 베스트 프렌즈들 많이 만나봤지만 지금 환자분은 이제껏 뵌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요. 근데 다짜고짜 오셔서 부부부불아...어머, 입에 담기도 낯뜨거워서. 아무튼 그런 얘기 들은 적 없으니깐 자꾸 우리 닥터 박과 연관시키지 말아주세요. 아시겠어요?”

 

남자는 친구 와이프고 뭐고, 자신 앞에서 눈을 흘기고 있는 여의사와 한바탕 하려던 마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진료실 문을 여닫는 그의 손이 짧게 파르르 떨렸다.

쓰읍.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에이씨. 이게 뭐냐, 쪽 팔리게.’

왜소한 체구의 남자는 결국 아시겠어요?’라고 하이톤으로 대꾸하던 여의사를 뒤로한 채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따라 그의 눈에 강남역 6번 출구의 아치모양이 서글프게 보였다. 초록빛의 문양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어느새 초록 물결로 넘실거렸다. 누가 볼까 싶어 남자는 재빠르게 옷소매로 눈가를 닦아냈다.

씨발, 사내새끼가 짜고 지랄이야.; 남자의 뺨이 잠시 반짝거렸다.

 

**

성명 나현석. 나이 만 서른. 미혼. 현역예비역. 직장경력 지역 케이블방송 사내 안내방송 담당 아나운서 2. 마포구 공동체 라디오 마포 FM’ 새벽 2-4 타임 디제이 활동 1. 지방 국립대 노어과 출신. 신체조건 예쁘장한 얼굴에 왜소한 체격. 안짱다리. 2대독자 외아들. 여친 없음. 특이체질 커피 향을 맡으면 붉은 반점이 생긴다. 버릇 1. 밥과 반찬이 입 안에서 섞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꼭 밥을 먹고 물로 입을 헹군 후 반찬을 먹는다. 버릇 2. 당황하거나 할 말을 잃거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의성어를 내뱉고 싶으면 일괄적으로 어이쿠야라고 말한다. 별 뜻은 없다.

 

**

덜컹거리는 2호선 순환선 4706번 열차에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교대, 사당, 낙성대, 서울대 입구 할 것 없이 금요일 저녁은 술요일 저녁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들, 초점 없는 눈빛들, 그리고 마늘냄새, 숯냄새, 사람냄새. 그러나 그 열차 칸 안에 한 사람만은 멀쩡했다. 멀쩡한 게 어지러울 만큼 정신이 멀쩡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멀건 국 한 사발을 내려놓은 엄마의 뿌루퉁한 표정은 현석을 늘 불편하게 했다. 말 없이 국에 숟가락을 집어넣는 현석을 엄마는 답답하다는 듯 잠시 흘겨보았다.

이제 지겹지도 않니? 내가 다 지겹다, . 언론고신지 뭔지.”

난 아직 스탠바이인 것 뿐이라니깐.”

큐 싸인 들어올 거였으면 애저녁에 들어왔겠다. 큐큐큐! 하고.”

엄마와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넌 할 수 있어라던가 역시 내 아들이 최고야따위는 엄마에게 어울리는 어휘가 아니었다. 스탠바이. 그렇게 따지고 보면 아들 대학 집어넣고 힘들게 살았으니 좀 놀아야겠다며 뜬금없는 황혼이혼을 한 엄마의 인생도 스탠바이가 아닌가. 뭘 원하고 뭘 하고자 하는 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일을 저지르고 보는 엄마도 그렇게 한심하게 여기는 아들의 인생과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은가. 누군들 스탠바이네요하면서 마냥 언제 올지도 모를 인생의 열차를 기다리고 싶겠나. 하다하다 지치면 진짜 이게 내 길인지 싶어 애초의 목표마저도 흔들리겠지만, 이왕에 거기까지 간 거 조금만 더 버티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으니. 최소한 그때까지의 시간과 정성을 봐서라도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와서 다른 곳에 기웃거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고. 마흔의 눈으로 보면 서른도 한창 때이겠지만, 알 수 없는 무기력함에 매일의 호흡이 턱턱 막히는 것은 또 어찌할 것인가. 젠장. 스탠바이. 나도 지겹다, 지겨워. 누군 좋아서 이러고 있나. 할 수 없어서 이러고 있지. 대안이 없는 변화는 무의미하다. 할 수 있었다면 마냥 이러고 있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

헉헉거리는 숨을 참으며 겨우 도착한 곳에는 호루라기를 불고 있는 남색 유니폼의 경비원만이 서 있었다. 에무는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신입사원 실기시험장과 관련된 안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경비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기 혹시 아나운서 시험장이 어딘 줄 아세요? 여기 근처라고 하던데…”

공채 말씀하슈? 이봐요, 여긴 별관이에요, 별관. 공채는 본관에서 하는 거에요. 잘못 찾아 왔구만.” 젊은 사람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만 같아 애무는 재빨리 고맙다는 말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 병신. 그러길래 아까 택시 기사한테 제대로 물어보고 말할 껄. 괜히 본관이라고 우기는 기사 꼴이 보기 싫어 별관으로 왔건만, 에무는 자신의 소심함을 탓하기 시작했다.

9 15분 전. 가까스로 방송국 본관의 철제 문을 통과한 에무는 건물 입구 벽면에 붙은 대기자 명단을 확인했다. 수험번호 38098-251 나에무 스튜디오 A-7 오전 9시 뉴스리딩. 에무는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하고 속으로 스튜디오 A-7’을 되 내이며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그날따라 방송국 네모난 바닥재가 유난히 우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장마철도 아닌데 이상하네라고 생각할 즈음, 그는 어느새 스튜디오 A-7앞에 당도했다.

 스튜디오 A-7이 있는 복도에는 스튜디오 A-1에서부터 A-10까지 총 10개의 스튜디오가 굳건한 방음 문의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잡음으로부터 자유롭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듯했다. 열 개의 스튜디오 앞에는 서 너 명의 대기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대본을 외우고 있었다. 순간 스튜디오 A-5에서 진행요원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정재형! 수험번호 38098-176 정재형!”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리부리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한 대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수험번호 38098-176 정재형입니다!”

군대 훈련장에서 갓 튀어 나온듯한 그 남자의 목소리에 다른 대기자들이 피식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령하는 것처럼 하실 필요는 없구요. 사운드는 저희가 알아서 조절하겠지만, 시험장에 있는 건 초감도 마이크라 평소에 말씀하시듯 하시면 되요. 아시겠죠?”

!”

여지없이 40데시벨에 육박하는 성량으로 답하는 그 대기자를 흘끔거리며 에무는 시간에 쫓긴 자신에게 안정의 최면을 걸었다. ‘괜찮아, 나현석. 넌 할 수 있어. 한 두 번도 아닌데.’

 

**

초감도 마이크는 현석의 생각보다 작았다. 진행요원이 다가와 잠시만 실례할게요하더니 셔츠 안으로 핀 마이크를 빼내어 넥타이 윗부분 옆에 살짝 달아주었다.

, 준비되셨으면 큐 싸인 갈 겁니다. 두 번째 스트레이트 기사부터 갈게요.”

짙은 네이비 컬러의 수트를 차려 입고 스튜디오 안 뉴스 진행자 자리에 앉은 에무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한 손으로 애써 진정시켰다. 옷 매무새를 짧게 다듬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한 번 쓸어 내린 그는 헛기침을 살짝 내뱉었다. 시이자악. 현석이 고개를 끄덕여 카메라맨에게 싸인을 주자 맞은편 정면에 붉은 색 불이 들어왔다. ON AIR.

오늘 새벽 3 10분경, 서울시 강동구 천호동 한 빌라에서 끔찍한 강도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경찰에 의하면 당시 빌라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이모씨와 일가족 3명이……”

. 됐습니다. 다음 8번 기사 가죠.”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씨가 탑승한 우주선이 성공적으로 발사된 이후 처음으로 우주에서 보내온 발신메시지 입니다. 이호영 기자가 전합니다.”

. 수고 하셨구요. 현석 씨는 스포츠에 관심 있나요?”

? 아직 부족한 편이지만 더 관심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우리 채널 메인스포츠 뉴스는 여성캐스터가 진행하는 데 어떻게 봤어요?”

. 매끄럽게 진행 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나현석씨는 더 잘할 수 있겠어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럼 한 번 야구 생중계 5분만 해볼래요?”

?”

아니 편하게. 지금 눈 앞에서 롯데와 두산이 경기한다 치고. 자유롭게 한 번 해봐요.”

 

**

? 야아. 그런 건 내가 전문인데, . 날 부르지 그랬어, 임마.”

지글거리는 불 판 사이로 돼지껍데기를 우적거리며 성한이 말했다.

어이쿠야. 그럴 새가 어딨어. 머리 속이 다 하얗더라.”

그래서 어쨌어? 지어서라도 해야 할 꺼 아냐.”

했지. 하긴. 근데 무슨 말을 한 건지 아직도 기억이 안 나.”

그러길래 평소에 애들이랑 야구장 가자고 할 때 같이 좀 가지.”

그러게.”

솔직히 야구야 어떻게 되든 관심 없었다. 공중파 아나운서 되려고 벅적거리는 야구장을 전전한다는 것도 우스웠다. 되고 싶은 게 있다면,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면 저승사자 밑이라도 기꺼이 닦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성한의 말이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저승사자 좋아하네. 동물원에 호랑이도 덮치면 무서워서 덜덜 거릴 자식이. 넌 군대나 갔다 와라. 서른 되어서까지 요리조리 뺀질 거리지 말고. 저 새끼도 그러고 보니 스탠바이구만. 군대 가기 일보직전.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인간이 어디 있을까 만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관여하는 행위 자체가 경멸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그 또한 스스로 속이 배배 꼬여 남이 옳은 얘길 하면 못 참아 하는 성격이라고 핀잔 받기 일쑤지만. 그렇다고 남이 던지는 얘기, 실제론 그다지 관심도 애정도 없으면서 무심코 흘리는 얘기에 인생이 엎치락 뒤치락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나조차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때가 이리도 많건만, 너인들 알리요. 각자 인생 나름대로의 하자는 알아서 처리하자는 식. 그게 현석이 생각하는 삶의 본질이었다.

**

지어서 하는 얘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평소 즐겨보지도 않던 야구중계를 하자니 그깟 5분이 더 이상 그깟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현석이 자신의 정면에 보이는 디지털 시계를 흘끔거리며 이사만루의 상황에 대해 어줍잖은 이야기를 내뱉고 있는 동안 면접관의 표정은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지던 순간 면접관 한 명이 그만, 수고하셨어요!’했다. 매번 느끼는 부분이었지만 면접장에서의 수고하셨습니다만큼 차갑게 들리는 수고도 없지 싶었다. 왠지 뭔가 잘못해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현석씨는 나이가 조금 있네요.”

. 이것저것 경험을 많이 쌓느라…”

우리 회사에는 총 몇 번째 시험 보는 거에요? 작년에도 본 걸로 기록되어 있는데…”

방송사의 기록 시스템은 의외로 치밀했다. 언론고시 스터디를 같이 하던 멤버의 얘기에 따르면 지난 번에 PD로 지원했다 올해 방송기자로 지원하는 바람에 그 이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했다. 솔직히 언론사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원분야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그 에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 들어가기만 하면 신문기자든 방송기자든 언론이라는 명실상부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손에 마이크를 잡건 타다닥 거리며 노트북을 쳐대건 방법은 별반 의미가 없다. 내가 말하고 내가 쓰는 것이 대중의 눈과 귀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짜릿하게 느껴질 뿐인 것이다.

마포 공동체 라디오라….거기는 뭐하는 데에요?”

. 말 그대로 소출력 라디오로써 마포 주민을 위한 방송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잠자코 있던 오른쪽의 여자 면접관이 물었다.

청취자는 몇 명이나 되요?”

현석은 순간 멈칫거렸다.

 

**

, 뭐라고 했어? 한 십만 명은 된다고 하지.”

성한은 태연한 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마포 인구가 사십 만 명인데. 그럼 그 중 사분의 일이 우리 방송을 들었다고 해? 걔네들이 바보냐, 그걸 모르게?”

그래도 임마. 일단 좀 뻥도 섞어 가면서 얘길 해야 심사하는 사람들도 귀가 쫑긋 설 거 아냐. 너도 네 입으로 그랬잖아. 언론사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애들이 매해 수 만 명씩 쏟아지는 판에 경쟁력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안 그래?”

성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파이 자체가 작은 상황에서 지원자는 매해 늘어나니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방송 한 번에 서른 명이 될까 말까 한 청취자를 십만 명으로 둔갑시키고 싶진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공중파에 들어가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벌이는 시원찮았지만 마포 라디오에 있을 때가 훨씬 속이 편했다. 처음엔 몇 명 안 되는 청취율에 신경이 쓰이긴 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수가 중요한 게 아니란 결론에 다다랐다. 애청자들이 올려주는 게시판 후기와 신청곡, 사연 등을 꼼꼼히 읽다 보면 공중파 라디오 부럽지 않은 보람도 느꼈다. 발렌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 때 자그마한 선물을 보내오는 청취자도 있었다. 소소한 낙이 모여 도란도란한 한 때였다. 라디오 방송이다 보니 외형적인 것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어 편한 부분도 있었다. 다른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성형이다 뭐다 할 때 현석은 캐주얼한 복장으로 목 관리에나 치중하는 정도였다. 라디오 방송이라는 게 스트레스가 극심하진 않았지만 매일 조금씩 하는 모양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축적되는 피로가 있긴 했다. 그런 부분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장이었는데역시나 그 놈의 돈이 문제였다.

 

**

현석은 끝내 야구중계가 마음에 걸렸다.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줄곧 굳어있는 것도 그것 때문인 것만 같았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현석의 입사지원서를 넘기는 소리만이 파스락 거렸다. 날렵한 티타늄 안경테를 쓰고 있던 한 남자 면접관이 물었다.

혹시 성형한 곳이 있나요?”

아니요.”

재빠른 현석의 대답에 면접관은 잠시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이어 물었다.

그럼 성형을 하실 의향은 있는 건가요?”

“….글쎄요. 해야 할 곳이 있다면야….”

말끝을 흐리는 현석에게 그 면접관은 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나 요즘은 아나운서도 연예인 못지 않은 미모를 가져야 한다는 게 정설인가 보다. 몸에 칼 대는 것도 께름칠 하고 고칠 돈도 없지만, 외모 때문에 미역국을 먹는 거라면 투자라도 해야지 하는 오기가 생겼다. 그러고 보니 초등하교 동창 놈 와이프가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던 것 같다. 강남역 근처라고 했던가. 수소문해서 거기라도 찾아가봐야겠다. 그나저나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지. 오늘 면접이라고 얘기도 못 했는데. 만년 백수 노릇 하는 게 탐탁지 만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왕에 아들한테 크게 인심 한 번 썼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될지 모를 심산이다.

나현석씨는 왜 아나운서가 되려고 하죠?”

. 저는 국민의 귀와 입이 되고자 합니다. 바른 언어를 사용하고 또한 신속한 정보를…”

아아, 잠깐만!”

현석이 답을 이어나가는 데 면접관 중 하나가 말을 툭 끊었다.

그렇게 판에 박힌 대답 말구요. 진짜 속마음을 한 번 얘기 해봐요. 왜 방송국에 들어오고 싶은 거죠?”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심사가 아무리 지겨워도 그렇지, 세태가 아무리 솔직하고 파격적인 걸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하는 심사가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왜 하필 내가 걸린 걸까. 다짜고짜 진짜 속마음을 한 번 얘기해 보라니. 무슨 얘기를 듣고 싶다는 건지 현석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임기응변에 강한 성한이라면 이때 어떻게 답했을까. 아니 올해 합격자가 될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했을까.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왜 하필 나람.

나현석?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한 번 말해봐요. 우리도 그냥 궁금해서 하는 말이니깐.”

면접관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현석은 죽을 맛이었다. 그 어떤 면접 족보에도 이런 유형은 본 기억이 없었다. 솔직한 대답? 그런 게 왜 궁금하지? 솔직한 대답? 그런 건 나도 없는데. 심사위원의 눈빛과 정면에 보이는 시계가 현석의 대답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현석은 아차 싶었지만, 이왕 뱉은 말을 주어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 모르겠다구요?”

심사위원들은 일제히 황당하다는 듯이 현석을 바라보았다.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이쿠야.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 와 있네요. 허허.”

면접관석이 잠시 술렁였지만 이내 익숙한 말투로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고 현석을 내보냈다. 면접장 스튜디오 문 위에 켜있던 ‘ON AIR’ 불도 풀썩 꺼졌다.

 

**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세대에 자비란 없는 법이다. ‘우리 땐 그러지 않았었는데하며 젊은 세태를 한탄하는 모양새야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매번 규격에 맞는 대답을 요구하는 것도 상 고문에 속하지 싶다. 무기력함에 대고 호통을 치면 돌아오는 건 메아리 없는 한숨뿐이다. 나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좀 알고 싶어요-하는 게 호환마마와 같은 병은 아니지 않은가. 그저 자연스러운 시대의 단상이랄까. 뭐라고 불러도 좋으니 그냥 내버려두어도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현석은 자신이 영원히 스탠바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큐 싸인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런 건 처음부터 없는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게 또 뭐 어떠냐고, 원래 인생도 물 흐르듯, 미래도 물 흐르듯 이뤄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없이 얼굴을 붉히는 세상에 대고 스탠바이이라고 외치는 게 낫겠다 싶었다. , 스탠바아아이-                  

WRITTEN BY B.KANG / JUNE 2008

2008/06/08 22:45 2008/06/08 2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