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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 해당하는 글들

  1. 2009/08/26  오늘이 당신에게 (1)
  2. 2009/07/08  강박적 혁신의 딜레마
  3. 2009/07/02  불량시민
  4. 2009/06/23  강보라의 프랙탈 (4), (5) & (6)
  5. 2009/06/16  아침형 인간 vs. 올빼미형 인간
  6. 2009/06/12  픽션은 논픽션보다 강렬하다
  7. 2009/06/10  Follow Your Instinct (2)
  8. 2009/06/06  학문과 학위 사이
  9. 2009/05/18  강보라의 프랙탈 (3)
  10. 2009/05/15  여자라서 고민돼요 (2)

오늘이 당신에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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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갈림길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 많은 스물 중반의 젊은 친구들이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선택이 너무 지겨워요. 삶이 선택의 연속이란 말도 지겹구요. 아는데, 알긴 아는데, 그래도 매번 너무 힘들어요. 뭐가 최선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렁그렁한 눈의 그들을 조용히 안아주는 것? 맵고 화끈한 거나 한 번 먹고 싹 잊어버리자고 하는 것? 아니면 시니컬한 웃음 지으며 life sucks라고 말해주는 것?

적어도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왜 너는 쓸데없이 고민만 하느냐고 소리치지 말 것.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게 뭔데?라고 윽박지르지 않는 것. 왜냐면 지금 바로 그럴 수 밖에 없고, 스스로도 딱히 답이 없기 때문이다.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리는 격으로 몰아붙이고 싶다면야 모르겠지만, 좋은 친구가 좋은 청자가 되어주고 싶거든 그러지 말도록.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A의 고통이 B의 고통보다 더하다, 덜하다는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쉽게들 나보다 더 처참한 환경에 놓인 이를 떠올리며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라고 하지만, 스스로의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렇게 너른 시각을 갖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소수에겐 가능하나, 그들은 일반인 이상이 반열에 오른 자이다. 달라이 라마라면 모를까.)

시간은 약이다. 백 번 맞는 말이다. 지나고 나면 별 일 아닌 것, 언젠가는 문득 떠올라 우리를 당황시키겠지만 순간을 모면하고 나면 과거 속에 묻히는 것.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 찰나. 그 짧디 짧은 시간의 폭을 감당하지 못해 우리는 고민하고 우리는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없는 방황을 거듭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답을 찾고 싶지 않은 이에게 답을 줄게-라고 말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다. 그냥 시간이 흐르게, 조용히 흐를 수 있도록 옆을 지켜주라. 당신이 누군가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상대를 약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실이 풀려버린 마리오네트 같은 존재를 만들고 싶지 않다면, 그냥 함께 시간이 흐를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상책이다.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은 해보도록.

누구나 방 안의 포인트벽지가 되고 싶어하지 은은한 미색의 기본벽지가 되고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시간의 흐름을 함께 지켜봐 준다는 것은 기본벽지가 되는 일이다. 평온한 마음으로 바라봐 주길. 그러면 당신의 친구는 금새 좋아질 것이다. 그 과정을 함께 한 당신 또한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고.이보다 근사한 덤은 없다.

2009/08/26 11:24 2009/08/26 11:24

강박적 혁신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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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c By Matthew Dent


<’무어의 법칙이란 게 있다. 마이크로칩의 밀도는 약 1년 반마다 2배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은 무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비행기가 힘차게 이륙하는데 사람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잠깐만, 거기 서 있어하며 매달리는 형국이다. 이런 일은 곳곳에서 자주 일어난다.> -존 마에다 총장,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RSID)

지난 주말 인터뷰 기사를 읽다 이거다싶었다. 언젠가 비슷한 맥락에서 <테크니컬 랑데부, 우위와 적합성>이란 글을 쓴 적이 있어 이와 같은 주제가 한층 더 깊게 다가왔다. 홍익대 변지석 교수님의 블로그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을 발견한 적이 있다. <Devil’s Theory of Innovation>이란 제목의 글에서 예로 든 건, 한 면도기 회사가 3개의 날에서 5개의 날로 업그레이드된 제품을 출시했는데 정작 사용자들은 그 미세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이전 것이 더 낫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실제 이러한 경우들은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어떤 조직이건 현상유지(status quo)보다는 지금보다 확장된 영역으로의 이행, 혁신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자면 내외부적으로 혁신이 필요한 때와 그 정도를 제대로 가늠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모두들 혁신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상한 최면에 걸려있지, 그 누구도 우리가 혁신을 과연 필요로 하는가? 왜 그런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필요에 의한 혁신이 아닌 ‘(통과의례적) 혁신을 위한 혁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위의 예들처럼, 혁신의 과정 이후 누구도 이에 대해 환영하거나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혁신이란 강박에 시달리게 되면 무조건 더 새롭고 더 모던한 무언인가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혁신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존 마에다 총장이 예견하는 것처럼, 정보기술의 괴리는 줄어들고 기술수준이 평평해지는 시대가 조만간 도래할 것이다. 문제는 혁신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당위성이며, 조금 더 다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는 힘-독창적 안목이 되지 않을까.  

2009/07/08 10:59 2009/07/08 10:59

불량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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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ucklava

촘스키가 강변했던 불량국가론은 비단 국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국가의 실체를 받아들인 이래, 시민의 입장에서 국가에 대한 비판은 여러 모양으로 있었지만, 거꾸로 시민이 시민의 자질 또는 양식에 대한 반성은 있었는지 물을 때다. 국가라는 권력과 개인 또는 집단의 권력 사이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는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이러한 파워게임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자의적인 해석이나 오용은 절제하고, 합리적 결정/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에 있어 국가든 개인이든 합리적 이성을 발휘할 수 있느냐는 문제나 공공의 선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느냐와 같은 의문은 여전히 남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국가와 시민이 아슬아슬한(?) 계약관계를 유지해왔음을 상기하며 일말의 희망을 걸어본다. 문제는 불량시민의 출현이다. 이해관계의 사각지대가 생겨나면서 그를 역이용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국가:시민=가해자:피해자의 공식을 만들어놓고, 상황과 명분을 가리지 않고 그를 적용한다. 최근 한 시민단체에게 예산 외 지원을 해주었는데, 돌아오는 건 또 다른 원성뿐이라던 정부관계자의 말은 왠지 측은하다. 비단 국가와 시민의 관계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간의 기본적 양식이나 예의조차 사라진 것에 대한 한탄이랄까. ‘도움 받는 자는 무조건 더 요구해도 된다는 사고가 용인되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도움을 주는 대상이 누구이던 간에 그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감사의 마음은 도움의 양과 질을 떠나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이 있다고 하여 기본적인 행정사안에 조차 자기이해중심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무료함에 시달려 달리는 버스에 총격을 가하는 세태를 보며, 국가 존재의 이유를 되묻기 이전에 시민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결국 막 나가는 시민까지도 덮어야 한다는 게 슬픈 국가의 운명이겠지만 말이다.


2009/07/02 18:22 2009/07/02 18:22

강보라의 프랙탈 (4), (5)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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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재가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내부 사정으로 인해 4,5,6회분을 동시에 포스팅하게 된 점 이해 부탁 드립니다.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다 제 자식인데, 그래도 끝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어 뿌듯합니다. 다음 학기에도 새로운 연재로 인터넷 판이 아닌, 정식 지면에서도 만나볼 수 있기를 바라며.

강보라의 프랙탈 (4) 테크니컬 랑데부, 우위와 적합성  

강보라의 프랙탈 (5) 섞임에의 권유, 통섭

강보라의 프랙탈 (6) 직업예술에 대한 고찰, 2030년의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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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17:02 2009/06/23 17:02

아침형 인간 vs. 올빼미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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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아침프로를 보다 아침형 인간에 대한 패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패널 또한 아침형 인간쪽과 올빼미형 인간쪽으로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각자 파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문제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었다.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방의 성실도나 창의력을 판단했기에, 반발도 거셌다. , 결론은 각자 생긴 대로 살자였지만… (허망한 1)

진화론적으로 보자면 현대화된 사회문화적인 여건 안에서 파생된 올빼미형 인간이 훨씬 진화된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침형 인간이 후퇴한 인간형이라거나, 현대사회에 맞지 않는 삶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침형 인간은 이전 시대부터 존속되어온 삶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쪽이고, 올빼미형은 조금 더 자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하자는 쪽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불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물론 아침형 인간이 대세였다. 서구근대의 칼빈주의와 같은 사상은 거기에 성실도라는 명분을 더해 사람들이 모두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쪽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 덕에 시간의 개념이 많이 변화한 지금, 올빼미족이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밤에 일을 하는 이들 중에는 예술적인 성향이 농후한 이들이 많다고 한다. 밤이 될수록 감성적이 되고, 그를 돕는 호르몬도 더 활발히 생성된다. 낮에는 할 수 없는 생각, 사회 규범에서 일탈하는 사고, 정답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은-밤에 더 잘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한 까닭에 창의적인 사람들 중에는 올빼미형이 많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물론 아침형 인간도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고, 그 안에서도 진화하게 되어 있다. 현대적 인간형이 무엇이냐-고 물어 하나만 정할 수는 없다. 대신 사회가 일률적인 타임라인 안에서 움직였던 이전 시대보다는 훨씬 복잡한 구성을 띨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2009/06/16 09:58 2009/06/16 09:58

픽션은 논픽션보다 강렬하다

최근 한 비평문을 쓰기 위해 다큐멘터리 한 작품과 드라마 한 작품 사이에서 갈등하다 드라마를 선택했다. 통상적으로 논픽션이 픽션보다 현실에 더 맞닿아있다고 여기지만,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면 픽션이 우리의 진실한 속내를 관통할 때가 많음을 고백한다. 일전에 졸작(拙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도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그 안에 담긴 논픽션이라고 주장하는 화면들은 작가든 감독이든, 누군가의 시각에 의해 정제된 무언가가 아닌가-하는 생각에 괴로워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훌륭한 논픽션 감독들이 만들어낸 진짜 다큐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럴 바에야 구체적인 실존인물, 실제사건처럼 진짜에요. 정말정말 믿어주세요. 이건 진짜라니깐요라고 전면에 광고를 할 게 아니라면, ‘어쩌면 있을 지도 모를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확률적으로 그게 불특정다수의 경험/기억 어딘가를 더 살갑게 어루만져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일찍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이 논픽션을 그만두고 픽션에 매혹된 이유를 진실성에서 찾지 않았던가. 픽션의 강렬함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p.s 소설이 좀 팔리나 싶었는데, 다시 자기계발서가 판을 친다. 나쁜 건 아니지만, 갑갑한 감이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은 각자 깨우치는 게 낫다. 그리고 잘 깨우치려면 사람을 그리고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우선이다. 그럴 땐 주저 말고 소설을 읽으시라. 그 어떤 자기계발서에서 보다 낯뜨거운 자신이 모습을, 주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009/06/12 21:35 2009/06/12 21:35

Follow Your Instin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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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창작에 관해서는 가장 솔직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나리오 쓸 때 담당 선생님께서 권해주셨던 책인데, 여러분들에게도 적극 추천합니다.>


유명한 소설가가 한 분 계셨습니다.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문하생을 구하지 않느냐고 여쭈었습니다. “난 그런 것 안 합니다라는 대답만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재미있는 일을 찾으세요. 나도 최근에 그랬으니깐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성공한 멘토가 한 분 있었습니다. 미래계획을 물으셨죠. 답을 했지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시더군요. “왜 여러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죠? 한 가지에 집중하세요.”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그리곤 당신의 여러 곳의 일들을 위해 걸음을 돌리더군요.

당신이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더 넓게는 창의적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엄연히 말해 이름을 알린 선배 예술가도 힘 있는 유명인도 당신을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특히나 매일의 선택 가운데 놓여, 어디로 가야 할 지 1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이 어떠할 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면 더더욱 말이죠. 한 때는 기대했던 게 사실입니다.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이, 롤 모델이 될 법한 이-들로부터 나의 삶을, 그 지평을 드넓게 해 줄 수 있는 한 마디를 말이죠. 그러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절대 누구도 당신의 질문을 대답해 줄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그 답이 당신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민이라는 개념을 깨우치기 시작한 청소년기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몇 년간 당신은 무척이나 다양한 이유들로 밤잠을 설칠 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처럼, 과거와 달리 지식이나 부도 안정된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사회 안에서는 고민의 깊이가 한층 더하겠죠. 그래서 우리는 쉽게 그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마련입니다.

위의 두 가지 예처럼 성공한 이의 삶을 답습할 수도 있고, 그로부터 조언을 얻으려고도 노력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이들과 다른 삶을 살 수 밖에 없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표피적인 말들에 좌지우지 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당신이 닮고자 하는 누군가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쉬이 책임지려고도 하지 않거나 자신에게는 공정하게 적용하지 못했던 말들을 다른 이에게는 쉽게 던지게 됩니다.

이보다는 자칫 불안정해 보이지만, 확실한 방법은 자신의 본능을 따르는 겁니다. 스스로 느끼는 재미와 행복, 그 이상의 답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다고요? 너무 근시안적이라고요? 미안한 얘기지만, 어차피 장기적인 계획대로 진행되는 삶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설사 계획세우기가 취미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사는 분들은 굳이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더 살아갈수록, 삶은 계획처럼 예측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겁니다.

물론 본능만을 믿고 따르기엔 불안한 요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를 즐기기 시작한다면, 그에 내어 맡기기 시작한다면, 최소한 당신의 정신적 부담감은 한층 덜 하지 않을까요? 열심히 사는 사람은 눈에 쉽게 보이지만, 재미있게 사는 사람은 드무네요. 어깨 너머 자신의 본능대로 살고 있는 이들을 부러워만 말고, 까치발을 서서히 내려놓으세요. 이제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만 살아가는 겁니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고,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바로 당....    

2009/06/10 15:03 2009/06/10 15:03

학문과 학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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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실험을 하나 해보죠. 학문과 학위 사이에 여러 전치사를 넣어보겠습니다. 다음과 같이요.

학문 (그리고) 학위

학문 (그러나) 학위

학문 (그래서) 학위

학문 (또는) 학위

이 외에도 다양한 적용이 가능하겠지만, 이 안에서만 논의를 도출해보도록 하죠. , 그럽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 번째와 같은 방식으로 사고합니다. 학문을 하고자 하니 학위를 한다-는 식이죠. 솔직히 이러한 사고방식에 그 어떤 하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찜찜한 구석이 있긴 하죠. 학문을 위해서 학위를 한다는 게, 대외적으로 정당성은 인정을 받겠습니다만, 좀 더 대담하게 나갈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말인 즉,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학위 없이도 밀고 나갈 배짱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라고요. 근데 사실 (우리끼리 얘기지만) 학문을 위해 학위를 하기보단, 학위를 위해 학문을 하는 경우가 더 많잖아요. 잘못된 거요? 없죠, 물론. 타박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의문은 그 다음 단계에 있습니다. 그렇게 학위를 얻고 싶어서 학문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그 다음에는요?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건가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 다음에도 학문하면서 살 지 않겠냐 구요? 그럴까요, 과연?

학문 (그리고) 학위는 그나마 학문과 학위를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일 겁니다. 그래도 그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해선 위의 가정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인정을 하는 것이고요. 학문 (또는) 학위는 각각의 독립성을 조금 더 존중하자는 입장일 테고, 학문 (그러나) 학위는 학문과 학위를 개별적인 것으로 봄은 물론, 학문을 하는 데 굳이 학위를 할 필요가 있냐고 되묻는 격이 될 것입니다.

학계에서 학위의 등장배경은 효율성에 있다고 봅니다. 고대사회에도 물론 선생과 제자의 관계는 존재했었죠. 그러나 비단 그 관계가 오늘날의 학위개념과 동일시 될 수는 없습니다. 당시에는 그 관계가 조금 더 유연하면서도 확고했다고 보여집니다. 서양 고대에서보다 동양 고대에서 보여지는 관계는 더 다양합니다. 다소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자연에게서 배우고, 제자에게서 배우는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니깐요. 그러던 것이 더 많은 이들에게 체계화된 교육이 제공되고, 그들 가운데서 배우는 이와 가르치는 이를 가르고, ‘많이 배운 이와 덜 배운 이사이를 가르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레 학위라는 게 등장했죠.

한국사회만큼이나 학위에 집착하는 나라는 아마 없을 겁니다. 7-80년대까지만 해도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따 가지고 오면 교수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만큼 을 위해서 학위를 취득하는 사람이 많이 없던 시절, 해외에 나가는 것 자체가 어렵던 시절에는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이야기가 어디 먹히나요? 소위 ‘U하는 유학생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5 10년씩 박사학위를 해도 원했던 교수자리는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근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의 교수시장이 포화된 지는 벌써 십 년 이상이 되었습니다.

참 이상할 노릇이죠? 학문을 위해서 학위를 한다면, 굳이 교수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을 텐데 말이죠. 학위에는 집착하면서 학문에는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현상,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겉으로는 학문이 우선이라지만, 결국은 모두 학위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학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학문의 본질이 흩뜨려 질 수 있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배움의 태도, 주변 사물과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학위 취득의 여부로 간단히 익힐 수 있는 문제일까요? 학문은 학위보다 훨씬 순수하고 객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학위라는 주관적인 목표를 위해 학문을 사용하다 보면, 그 본래의 성질이 변할 수도 있겠죠. 학자라면, 아니 최소한 학문을 하는 이라면 이에 대한 끊임없는 자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장사꾼 같은 박사, 정치하는 교수, 토익 공부만 하는 대학생-모두 학문과는 왠지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학위는 진짜 학문하는 사람학문을 하는 척 하는 사람을 구별해주는 기준으로 다시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만약 학위에 그러한 필터링기능을 하게끔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다르게 나아가야겠죠. 학위가 없이도 학문할 수 있는, 그런 이들을 독려하고 존중하는 사회로 말이죠. 현대의 효율성은 많은 것을 얻은 만큼 많은 것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게 바로 학위수여자는 많지만, 학자는 부족한 우리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은 왜 배우나요? 한 번쯤 묻고 싶습니다.   

(서비스) 재밌는 사이트 하나 소개하죠. Ph.D의 애환을 절절히 담고 있는 연재 만화입니다. 공감하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즐감하시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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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6 10:48 2009/06/06 10:48

강보라의 프랙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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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이랑 겹치다 보니 핑계 아닌 핑계로 업데이트가 더디게 되었네요. (심심한 사과를) 이미 6편의 주제와 간단한 아이디어 스케치를 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매 회 텅 빈 백지에 무시무시한 커서만이 연신 껌뻑 거리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글 쓰는 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공포!) 아마도 아직까지 연필을 깎아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시는 김훈 선생님과 같은 분들은 느끼지 못하는 구석이 아닐까 하고 감히추측해 봅니다. 이제면 좀 글 쓰는 게 쉬워지려나,했는데 이 모든 잠시의 생각조차 대단한 오만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다시 종아리를 힘차게 내리칩니다. 거울을 닦는 심정으로, 도자기를 빚어 내리는 심정으로, 가마솥 밥을 짓는 심정으로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는 조금이나마 깨닫겠지요. 글쓰기에 있어 마침표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그나마 쉼표도 수십 년을 달려온 이에게만 주어지는 큰 상이라고. 짧은 글 하나 쓰고서는 설이 길었네요. 아무튼 산고 끝에 탄생한 녀석입니다. 물론 더 주물럭거렸으면나은 녀석이 탄생했으리라 믿지만(믿고 싶지만), 만삭둥이가 늘 예쁘란 법은 없으니 이쯤에서 그만 세상에 내 놓아야겠거니 했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읽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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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8 21:23 2009/05/18 21:23

여자라서 고민돼요

프롤로그

어떤 젠더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면 입을 잘 열지 않는 성격이라(때론 소모적인 논쟁이 난무한다고 생각하기에), ‘여자라서’, ‘여성이어서란 조건을 다는 것도 좀 구차하게 느껴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여자라서 고민된다는 식의 논의를 펴는 것은, 사회구조 상 그리고 젠더 특유의 성질 상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고개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스물의 여자가 다르고 서른의 여자가 다르듯, 여자가 가지게 되는(또는 가질 수 밖에 없는) 고민의 성격도 바뀌게 되어있다. 누군가에겐 굳이 여자여서가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서의문제일 수도 있겠다. 이러나 저러나 고민이 되는 건 이성이 달린 슬픈 동물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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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길을 막는 건 바로 너야

최초라는 수식어를 다는 것은 원조라는 수식어를 다는 것만큼이나 부담이 되는 일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지만, 작은 예술학교의 최초의 여성총학생회장 당선’, 그리고 최초의 여성러닝메이트 당선이란 꼬리표는 들리는 것만큼이나 거룩하고 영예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학생회 일이 한창이던 때, 여지없이 봄날의 축제는 시작되었고 그 기간 동안 같은 공간을 사용하고자 했던 한 과목의 교수님과 맞닥뜨리던 순간,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어머, 여학생들이 이끄는 총학이라니, 얼마나 고무적인지 모르겠네요.” 생글거리는 말문을 트고 난 이후에도 그 고무적인 성과에 대해서 한참을 떠드시더니, 결국은 고무적인 성과를 낸 여성회장단에게 내가 쓸 자리니 물러나라고 물러서지 않는 여성적 전투성을 몸소 체험케 해 주셨다. 물론 두 가지 일은 성격이 다르기에 하나의 사안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 최소한 고무적인 성과에 대한 포문은 아예 열지 않았던 게, 같은 여성vs여성의 대화에서 훨씬 덜 비겁해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굳이 매사에 그 공식이 들어맞지 않았으면 하지만, 정치적인 여자의 적은 정치적인 여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 때 미처 못한 말: 난 당신을 위해 고무적이고 싶진 않군요.)   

괜찮아, 이것 봐, 얼마나 근사하니

아이러니는 여자의 적뿐 아니라 여자의 친구도, 그것도 최고의 친구도 여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얼마 전, 작지만 실속 있는 전시회를 앞두고 고민하고 있는 작가 친구를 만났다. 공모 데드라인에 맞추어 전시컨셉을 잡기는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설치해야 하는 날짜는 다가오고, 기대하는 주변인은 많고, 시시한 작품을 내고 싶지는 않고,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스물 넷의 친구였다. 조언을 듣고 싶다는 말에 작업실을 찾아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친구는 그래, 언니가 해주는 말이 필요했어라며 구겨진 인상을 조금 풀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예술의 문제에 있어서 타인이 구체적인 답변을 해주기는 어렵다. 나의 경우도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언니또는 같은 여자친구로서의 심정적 지원은 때론 남자친구의 그것보다도 부모의 그것보다도 더 가깝고 에너제틱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여자는 여자의 자신감, 그리고 자존심의 영역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줄 수도 누구보다 더 다치게 할 수도 있다. 결국은 양날의 칼을 모든 여자들이 서로를 향해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글쎄. 그건 비단 젠더의 생리이지, 좋고 싫고 또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여자가 듣고 싶어하는 건 (물론 남자의 경우에도 상이하다고 믿지는 않는다), 결국 괜찮아’, ‘좋다’, ‘이해한다’, ‘그래’. 때때론 참 근사하다란 말일 게다. 어렵지 않다고? 곰곰이 돌아보라. 스스로 얼마나 자주 이런 말을 했는가를 말이다.   

결국은 ‘우리의’ 문제더라

일전에 EBS의 간부직에 계시던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10년 후 이력서를 한 번 써보라고 하셨다. 상상의 나래를 편 채, (당시 로스쿨 문제로 한창 시끄러웠다) 5년 후 로스쿨 졸업, 이후 방송통신법 관련 전문변호사 따위의 내용을 가득 채웠었는데, 돌아온 건 한 마디 질타. “어떻게 개인적인 삶은 그렇게 쏙 빠졌어?” 당시에는 누가 감히 이력서에 결혼, 출산 등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를 쓰겠나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누가 보기에도 부러워할 만한 이력서를 써 가지고 오라는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삶에 대한 고찰, 계획에 대한 재고에 대해 찬찬히 훑어보라고 주신 시간이었던 듯. 그걸 서른의 문턱에 서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요지경 같은 요즘 세상에선 시원한 정답이 없다. 결혼을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 일을 해도 문제, 놀아도 문제, 살아도 문제, 죽어도 문제. 모순 투성이라, 굳이 하나를 쭉 밀고 나가는 게 쉽지 않다는 거다. 최근엔 자연스레 결혼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는데, 그게 굳이 나만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더라는 게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그래도 결국 인간은 혼자가 아니더냐, 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본질적으로 나와 너의 문제이지 오롯이 나만의 문제로 끝나지 못한다. 그런 속성을 생각할 때, 나만을 위해 공부하고, 나만을 위해 결혼하고 나만을 위해 자아성취를 하지는 않는 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에서부터 코스모스라는 큰 사회에 이르기까지 범위의 문제이지, 결국은 그 안의 나이기 때문에 내일이 있고, 그 다음이 있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나, 여성의 문제도 너, 우리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다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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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차마

위의 상황들은 모두 현재진행형이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란 거다. 그리고 아마 여기에서 이란 영영 없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자라서 고민되는 문제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원망도 해보고,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가 아닌 무엇이 되던 간에 문제들은 산재해 있다. 과거 사회에 비하면 그 문제들이 적어졌다고는 하지만, 난 다르게 생각한다. 문제의 양이 아닌 성질의 문제다. 과거의 문제와 오늘의 문제는 그 성격이 바뀐 것이다. 그렇기에 고민의 시기는 달라졌을 지 언정, 총체적인 스트레스는 유사하다. 그러나 젠더가 이미 숙명이라고 한다면, 그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대한 조화롭게 해결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힘든가? 포기하고 싶은가? 우리를 좌절시킬 만한 이야기들은 무궁무진하다. 이 와중에도 힘이 되는 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무수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힘이 되는 건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란 거다. , 해낼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여자여, 일어나라. 그리고 함께 걸어가라. 그대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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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라에 의해 창작된 여자라서 고민돼요 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05/15 12:51 2009/05/15 12:51